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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좋은 비둘기파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3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회사의 사활을 건 비둘기파와의 위험한 동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라는 말은 정말 이럴 때 하는 말인가 보다. 일거리가 없어 폐업 일보직전인 회사에 다니고 이혼한 전력을 가지고 있으며, 술과 담배를 늘 달고 사는 이 남자. 어쩜 그렇게 인생이 꼬였을까 하는 안쓰러움과 동정심이 절로 생기는 이 남자는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스기야마다. 한심한 회사를 다니며 쓸쓸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런 그에게도 작은 희망이 있었으니 이혼한 아내 사이에서 얻은 딸 사나에다. 비록 딸과는 떨어져 살고 있지만 그 애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만은 그 누구 못지않다. 지리멸렬한 인생이지만 딸아이를 위안 삼아 그렇게 버티고 견디며 사는 것이다
이런 그에게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긴다. 그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 이시이가 그만 야쿠자의 일을 받아온 것이다. 어려운 회사 형편에 이것저것 일을 가릴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야쿠자의 일은 돈을 떠나서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사장과 스기야마를 비롯한 회사식구들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전전긍긍하지만 이미 일을 하기로 결정한 터라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양심의 가책을 뒤로하고 반강제적으로 야쿠자의 의뢰를 받아들여 스기야마는 일을 진행시키기로 한다. 그리고 의뢰자인 '비둘기파'와 일에 관한 구체적인 협의를 위해 심상치 않은 첫 대면을 갖는다.
예상한 대로 비둘기파가 의뢰한 내용은 쉽지 않았다. 기존의 통념을 거의 뒤집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스기야마는 프로다운 뚝심과 동료들의 지원 그리고 딸 사나에로부터 얻은 의외의 도움으로 주어진 일을 어렵사리 해나간다. 하지만 그에게 내려진 과제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비둘기파는 사장과의 강압적인 비밀계약을 미끼로 좀 더 광범위하고 적극적인 광고를 의뢰한다.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실적과 광고효과를 올려야 하는 것도 추가됐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난관이 스기야마의 앞을 가로막지만 다행히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물한 것 같다.
어려운 과제임이 분명했지만 스기야마는 오랫동안 업계에 종사하면서 익힌 자기만의 수완을 발휘한다. 게다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동료들의 유효적절한 도움도 큰 보탬이 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첫 번째 의뢰 건에서처럼 딸 사나에가 또 한 번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두 번째 일을 처리하면서 스기야마는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달리기를 시작한다. 일을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달리는 연습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달리기는 가츠야라는 비둘기파의 어린 '행동대원'과 함께 했다. 비록 야쿠자의 조직원이긴 하지만 두 번째 일에서 가츠야의 비중은 상당히 높았다.
가츠야를 달리기 연습에 동참시키고 나아가 두 번째 작업과 관련되는 일에까지 투입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시종일관 무관심과 적대감을 보이는 가츠야와 친해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츠야는 정에 목마른, 누군가 자신을 알고 인정해주길 바라는 어린 소년이었다. 스기야마가 그의 실력을 인정하면서 마음의 문을 열자 타인에게 냉담하던 가츠야도 결국 그만의 방식으로 화답한다. 순하고 실력까지 갖춘 비둘기파 어린 조직원의 뜻밖의 도움으로 스기야먀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다. 그러니 이제 스기야마의 회사와 비둘기파의 위험한 동거는 이것으로 끝난 걸까?
<사이좋은 비둘기파>는 궁지에 몰린 한 회사의 위험천만한 모험을 그리는 한편 자식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감수하는 이 시대 아버지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스기야마는 물론 사장인 이시이 그리고 비둘기파의 가와타와 고바토 모두 자신의 처지가 어찌됐건 간에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일 뿐이다. 야쿠자라는 다소 무거운 소재를 사용했지만 위트 있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다양한 인물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그린 <사이좋은 비둘기파>는 재미는 물론 소소한 감동을 전해준다. 독특한 인물들이 펼치는 유쾌한 대반란! 이 소설은 그렇게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