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악은 그렇게 그의 머릿속을 지배해갔다
늘 안개에 싸여있는 퇴락한 도시에서 벌어진 연쇄살인. 그리고 피해자들을 기묘한 형태로 훼손한 살인범의 잔인한 행각. 우중충하고 스산함이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서 범인과의 싸움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소설은 경찰과 살인범간의 쫓고 쫓기는, 박진감 있는 전개를 택하는 대신 살인범의 과거와 심리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그래서 소설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장면이 많고, 인물들의 심리상태에 대해서 구체적인 묘사를 하기도 합니다.
연쇄살인을 다루는 모든 소설이 그러하듯 살인범이 양산해 내는 시체가 점점 늘어날수록 사건의 단서는 늘어나고 사건의 해결을 맡은 주인공의 의욕은 강해집니다. 하지만 소설은 범인을 향해 정점으로 치닫지 않고, 한번 꺾어 중심인물들의 과거사를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과거와 그 과거로 인한 현재의 심리상태는 연쇄살인사건에 얽힌 모든 수수께끼에 중요한 단서가 되고, 극 후반부의 극적인 반전 요인이 됩니다.
사건의 배경이 되는 안개 가득한 침니랜드는 주인공 매코이의 의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모든 것이 희미한 안개 속 세상처럼 매코이는 머리에 입은 총상으로 기억의 단절과 의식의 암전을 겪습니다. 여기에 거짓기억과 망상이 더해져 그는 ’자아의 분절’까지 겪게 됩니다. 살인범과의 마지막 조우, 끔찍했던 고통의 기억, 직업적 사명감, 자신의 기억에 덧칠해진 거짓말 등등 뒤죽박죽된 그의 기억은 그를 전혀 다른 두 인간으로 만듭니다.
범죄현장을 종횡무진 하는 매코이와 고양이를 찾아 헤매는 매코이는 왠지 달라보였지만 혹시나 하는 의혹은 없었습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서 모든 게 드러나는 순간 아! 하고 느낄 뿐이었죠. 소설은 재미있었습니다. 다만 이렇다 할 복선도 없이 극 후반부에 너무나 많은 사실이 드러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심리 스릴러’를 표방한다면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범행 사이에 좀 더 연관 깊은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한편 <악의 추억>은 상당히 흥미로운 구성을 취했습니다. 바로 소설 속에 퍼즐 게임을 넣은 것입니다. 퍼즐은 이 소설의 중요한 구성 중에 하나입니다. 퍼즐 속 단어가 ’그’에 의해 현실의 사건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퍼즐은 마치 충동의 기폭제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의식의 밑바닥에 침잠해 있던 단어가 정신이 혼미해진 틈을 타 의식세계로 부상한 뒤 ’조합된’ 사건을 일으키는 셈이죠.
소설을 읽는 내내 이 이야기가 <블랙아웃>이라는 영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기억의 암전을 겪는 사람과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이라는 두 가지 축이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주인공의 뼈아픈 기억 또한 닮아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한 인간이 겪는 기억의 암전과 모종의 음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극적 반전만을 취하려 합니다. 반면에 이 소설의 경우는 불명확한 의식세계와 주인공의 과거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각인된 현실감각(퍼즐)이 조합돼 한 편의 기막힌 심리 추리극을 완성합니다.
한 인간의 충격적인 과거와 그 사건으로 인한 스트레스 그리고 의식세계에서 보았던 단어는 그의 무의식 세계에서 뒤범벅되어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어쩌면 그가 그토록 증오하던 악이 상처 입은 머리에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까지 앓던 그의 의식을 순간적으로 잠식했던 건 아닐까요. 약하디약한 한 가엾은 영혼은 그렇게 악의 기운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뿌리칠 수 없는 악의 마력 때문에 그는 다른 인간이 되었던 겁니다. 그에게 슬픈 운명을 떠넘겼던 악은 그렇게 추억거리 하나를 만들었던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