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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디자인 산책 ㅣ 디자인 산책 시리즈 1
안애경 지음 / 나무수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자연을 닮은 핀란드의 디자인 세계
근래에 들어 공공 디자인을 비롯한 디자인 전반에 관한 인식이 전과 사뭇 다르다는 느낌이다. 국가 이미지, 도시 경쟁력이라는 측면에서 디자인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으며, 전국의 도시마다 난립하고 있는 간판을 정비하기 위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자극적인 색이 사용되고, 제각각 크기가 다른 간판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도시의 오염원이었다. 주변과의 조화나 공공 디자인적인 측면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이런 도시의 간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본래의 기능조차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어느 누구도 개선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도 최근에 부는 디자인 열풍이 이 오래된 관행을 말끔히 씻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돌아보면 우리 주위에는 도시 디자인이라는 영역에서 생각해볼만한 것들이 거의 전무하다. 과거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재와 유적은 박제된 채로 고립돼 있으며, 우후죽순 생겨나는 신식 건물의 대부분은 어떤 미학을 논할 가치조차 없는 콘크리트 덩어리일 뿐이다. 과거와는 철저히 단절되어 있고, 현실에선 단조로움의 극치로만 일관하는 우리의 도시 디자인,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경제성과 신속함만을 내세우면 추진되었던 도시정책은 도시민의 삶에서 자연을 유리시켰고, 시민들의 마음속에 메마른 감성만을 남겼다. 찾아야만 갈 수 있는 공원, 도시의 장식물이 된 가로수 등등 자연은 피부로 느낄 수 없을 만큼 도시민들에게서 멀어져갔다. 자연이라는 여유 공간 혹은 쉼터가 마련돼 있지 않은 도시는 각박한 사회를 만들었으며, 이런 도시에 찌든 사람들에게 상상력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낡은 것은 모조리 부수고, 새것은 빨리 지어야 한다는 생각과 자연에 눈을 돌릴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쩌면 지금의 도시 디자인은 충분히 자기 역할을 한 것이다. 디자인은 원래 모두가 원하는 쪽으로 흐르게 마련이라 경제성과 신속함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맞는 건 자연이 살아 있고, 개성이 넘치는 공간보다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포장한 단조롭고 차가운 공간이 더 어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간은 삶을 윤택하게는 할 수 있어도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지는 못했다. 거리의 사람들은 휘황찬란한 간판의 물결에 현혹돼 이런저런 카페에서 잠시 쉬어가지만 얼마의 돈이 필요하고, 철저히 닫혀 있는 그 공간에서 만족스런 안식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무 그늘과 튀지 않는 모양의 벤치, 가까이에 잔잔하게 흐르는 물이 있고, 무엇보다 콘크리트 바닥이 아닌 흙을 밟을 수 있는 곳이 거리에 널린 카페보다 훨씬 많은 위안과 평온을 제공해 준다.
핀란드의 디자인 역시도 그런 자연과 가까운 삶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늘 함께하는 자연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작은 기능을 보태 디자인을 완성하는 그들은 모습은 디자인의 출발점이 어디여야 한다는 걸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낡고 오래된 것들을 부수고, 새것을 만들기보다 최대한 그대로 남겨둔 채 필요에 맞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부수고 만들면 쉬울 것을 그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기존의 것의 생명을 이어나간다.
자연을 그대로 두고 보기를 즐기며, 재활용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핀란드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그렇게 아름다운 도시,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갔다. 작은 소품은 물론 거대한 주거공간까지 그들의 디자인에는 자연이 묻어나있었다. 낡고, 망가지고, 버려진 것들이 디자인으로 새로운 이름을 얻고, 그것들이 다시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이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새롭게 커나가는 우리의 디자인도 먼저 자연을 생각하고, 옛것의 소중함을 아는 것부터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