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 1 - 이기원 장편소설
이기원 지음 / 삼성출판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신분의 벽을 넘어 의사가 된 한 남자의 이야기

구한말, 조선은 시대적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고, 거리에는 전에 없던 낯선 광경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얼굴색이 다른 외국인과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양반 못지않은 지위를 가진 중인들이 바로 그 변화의 중심에 선 인물들이었다. 외국인들의 출현으로 세상은 더 넓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과거 농업에 비해 천대 받았던 상공업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한 수혜로 그 중요성이 점점 더 커져갔다. 알량한 명예보다 손에 쥘 수 있는 돈이 더 중해지는 시대로 사람도 세상도 함께 변하고 있었다.

시대적인 흐름에도 불구하고 이를 역행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신분제도와 뿌리 깊은 계급의식이었다. 신분제에 따라 양반은 항상 우월한 위치에 있으며, 그 아래 평민이 있고, 평민의 밑에는 사람 취급조차 않는다는 천민이 있었다. 천민들은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았고, 그들만의 부락을 이루며 살아야 했다. 가축 도살이나 종살이가 그들의 주된 일이었으며 이는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천민이란 꼬리표 탓에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살아야 했던 그들, 하지만 우연한 기회로 신분의 벽을 넘어선 자가 있었다.

황정은 원래 소근개라는 이름 같지 않은 이름을 지닌 백정이었다. 어느 날 그는 위협에 못 이겨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목숨만은 살리고자 도망자 신세가 된다. 하루아침에 쫓기는 처지가 됐지만 다행히 친구의 도움으로 양반의 신분을 얻은 그는 백정이 아닌 양반으로 새로운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가 몸담기로 결심한 일은 바로 ’서양식 의료’였다. 부상당한 그를 치료한 방법이자 자신의 어머니가 받았던 의술이기도 한 신식의료는 단박에 그의 눈을 사로잡았고, 호기심 이상의 관심을 갖게 한 대상이었다.

그가 신분을 감춘 채 서양인 의사의 보조가 되고, 열심히 의술을 연만할 때만해도 행운은 늘 그의 편인 듯했다. 하지만 살얼음 걷는 것 마냥 위태로웠던 그의 하루하루는 결국 그의 신분이 노출되면서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그동안에 배운 서양의술에 대한 지식으로는 조선인 중에서 가히 으뜸의 실력자가 된 그였지만 신분의 벽 앞에서는 철저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한계를 실감한 황정은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모든 걸 체념한 뒤 몸이 불편한 아버지 곁에서 다시 백정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한낮의 꿈처럼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그의 미래. 현실은 가혹하리만치 냉혹했다. 더 이상 자신의 꿈을 이룰 기회는 없을 거라 단념하는 순간 뜻밖의 일이 그를 ’의사의 운명’으로 이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다 하며, 낯선 서양의술을 누구보다 열심히 배우려 했고, 환자를 대함에 있어서도 의료인이 갖추어야 할 자질이 충분히 보여줬던 그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제중원의 원장 헤론이 다시 뜻을 펼칠 수 있게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황정이란 진짜 이름을 가지고 다시 진료를 시작한다.

제중원의 일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황정은 무리 없이 해나갔다.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가 있었으며 조금도 쉬지 않고 많은 환자들을 돌봤다. 신분이 바뀌었음에도 백정이라는 편견으로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던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들은 뒤에서 수군거리며 갖은 모략을 일삼았지만 황정을 오로지 의술만으로 편견의 벽을 깨려고 노력했다. 인명의 귀함에는 양반도 노비도 따로 없다는 신념아래 철저히 평등하게 진료했던 황정. 그는 조금씩 서서히 완벽한 의사가 되어갔다.

평등한 진료와 완벽한 치료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지만 조선이란 땅에서 그의 의술을 마음껏 발휘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웠다. 남녀가 유별해야 한다는 의식은 그로 하여금 진료의 한계에 부딪히도록 만들었으며, 금기를 깨는 모험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 또한 조선에 야욕의 손을 뻗던 일제의 검은 마력도 그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었다. 악전고투가 따로 없는 의료행보였지만 그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그는 숱한 위기에서 살아남아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일에 전념했다. 혼신을 다해 의사로서의 사명을 다한 황정, 그는 다 쓰러져가는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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