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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가 내 삶에 들어왔다, 교토
이혜필 지음 / 컬처그라퍼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천년 수도의 도시 교토, 그 곳에서의 하루
교토라는 도시 이름을 처음 들어본 건 수년 전 당시 박지성 선수의 소속팀이었던 교토 퍼플상가라는 축구팀 때문이었을 것이다. 팀 이름도 지명도 그 때 당시의 내겐 모두 낯설었지만 우리나라 선수가 뛰고 있다는 사실 하나가 그 낯설음을 친근함으로 뒤바꿔주었다. 그렇게 내 삶에 잠시 나타났던 교토는 TV나 신문에서 지명의 하나로서만 이따금 스쳐지나갈 뿐 제대로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읽었던 두 소설을 통해 비교적 구체적인 공간으로서의 교토와 다시 만나게 됐다.
<왕의 밀사>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각각 과거와 현재의 교토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 소설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공간묘사와 사실적인 지명 언급은 교토라는 도시가 이런 곳이구나! 하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특히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는 위풍당당하게 활보하는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교토 곳곳이 비춰지고 있어 가히 '교토소설'이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가보지 않은 어떤 곳의 묘사를 내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나 하는 점 때문이다. 나 역시 본토초, 치토세야 등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를 오로지 상상에만 의존한 채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 게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아 답답했다.
'이 놈의 교토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하는 생각이 당연히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로는 교토만큼 전통과 현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곳도 없다고 하던데, 그렇게 멋진 곳을 여태 모르고 있었다니 이렇게 한심할 수가 없다. 이렇듯 아쉽고 궁금한 내 마음을 달래준 게 바로 <그 도시가 내 삶에 들어왔다, 교토>다. 꼭 필요할 때 내리는 단비처럼 정말 궁금하던 차에 이 책을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가웠다. 게다가 책은 '여행지 교토'보다 '삶의 공간으로서의 교토'를 담고 있어 교토라는 도시에 풍덩~하고 싶은 내게 더욱 제격이었다.
저자 이혜필 씨는 짧은 머묾이 아닌 새로운 일상의 장으로 교토를 선택한다. 그녀 스스로를 내몰아 시작한 6개월간의 교토생활. 책은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모습으로 보여주며 문을 연다. 저자는 거처할 곳에 짐을 풀고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장만한 뒤 바로 교토 탐색에 들어간다. 저자의 발걸음이 곳곳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두 눈을 사로잡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교토의 부엌'이라 불리는 니시키이치바다. 사진 속 모습은 꼭 우리나라의 대형 상설시장을 연상시키지만 질서정연하면서도 깔끔한 것이 일본식 시장이라는 느낌을 물씬 풍긴다. 이어서 등장하는, 내가 가장 알고 싶었던 곳 본토초. 이곳은 예스런 모습의 중후한 매력이 돋보이는 '전통'거리였다. 두 컷의 사진이 전부였지만 그 곳의 풍경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잘 담아냈다.
전통의 모습이 녹아있는 도시답게 저자의 발길이 닿는 여정 가운데서도 잘 보존된 옛 유적지가 단연 돋보였다. 금각사, 은각사 등의 사찰은 물론 교토고쇼, 니조죠 등의 유적지까지 한결같이 현대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있으면서도 전혀 현대의 느낌이 배지 않은 채 전통과 자연이 오묘한 조화를 이뤄 멋지게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전주 역시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표방하고 있는 도시지만 전통의 모습은 현대의 영향력 아래 조화처럼 살풍경하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뿐 그 어떤 멋도 찾아 볼 수 없다. 이에 비해 교토가 지닌 특유의 멋스러움은 질투가 날 만큼 몹시 부러웠다.
멋만큼 중요한 게 바로 맛. 저자는 교토의 다양한 곳에 독자들을 안내하면서도 이름난 맛집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먼저 아지 비루라는 곳이 눈에 띈다. 층 식당인 이곳에서는 푸짐한 식사가 가능하다는, 일본식당답지 않은 놀라운 특징이 있었다. 한편 단풍이 아름답다는 도후쿠지에서 파는 크기를 가격으로 정하는 군고구마가 참 이색적이었고, 면 요리 전문점 나다이 오멘의 음식이 참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저자의 이런 음식이야기에는 항상 같이한 일행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교토라는 낯선 곳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으로 여행지기는 물론 맛집 대동을 기껍게 생각하는 그들을 보면서 여행과 삶에 있어서 진정으로 소중한 게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여행,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그 도시가 내 삶에 들어왔다, 교토>를 읽는 내내 이국의 낯설지만 아늑한 풍경에 슬며시 빠져들면서 삶에 있어 여행이 주는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단조로운 삶에, 관성으로 굳어져 가는 삶에 여행이라는, 아니 낯선 곳에서의 시작이라는 뜻밖의 계기가 어떤 활력을 주고 어떤 만남과 인연을 가능케 하는지를 알게 됐다. 나에게도 내 머릿속을 차고 나올 듯한 압력이 생기면 오늘을 뒤로 하고 또 다른 내 삶을 위해 짐을 꾸리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