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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축복
오가와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읽는 순간만큼 앎으로 채워지는 시간이 설레면서도 기쁘게 느껴지는 때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아마 사랑하는 그 또는 그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순간을 제외하면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일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오가와 요코의 소설을 읽을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뭔가가 부족해 보이는 이들의 사랑얘기며 중요한 일을 까맣게 잊고 멍하니 있거나 알 수 없는 사건에 열을 올리는 이야기 또는 기묘하다 싶을 정도의 집착에 관한 내용 등 요코의 소설은 그녀를 단정 지을 수 있는 무언가로 정형화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이야기에 거침없이 빠져든다.
처음에는 변주에 능한 그녀의 기교에 매료된 거라고 생각했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보여준 사랑과 <호텔 아이리스>에서 그린 사랑은 '사랑이야기'라는 껍데기를 빼면 전혀 다른 내용물이다. 그래서 그 두 소설이 요코의 손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이러면 안 되는데'하는 주제 넘는 노파심과 당혹감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글이 전혀 싫지 않았다. 퇴폐와 순수라는 극과 극을 오가는 그녀의 글쓰기에 경악하면서도 표현의 한계나 방향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가 글쓰기가 퍽 괜찮아 보였던 것이다. 이런 나의 그녀를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긴 건 <임신 캘린더>, <미나의 행진>, <슈거 타임> 등 요코의 다른 작품을 만나게 된 후부터다.
특히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임신캘린더>는 '기교파'라는 그녀에 대한 나의 단순한 생각을 완전히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기교라는 꽃다발을 만들기 전에 이미 그녀의 소설은 하나의 꽃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흐름과 몽환적이고 야릇한 느낌의 사건들 게다가 감정의 기복을 넘어 혼란스러울 지경에 이르게 만드는 특유의 필력. 이 모든 게 어우러져 있는 아주 새로운 느낌의 요코를 만났다. 기교 없이도 빛나는 싱싱한 한 송이 꽃을 본 것이다.
<우연한 축복>은 이렇게 이미 그녀의 작품세계 깊이 와있는 내게 그녀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 소설이다. 아니 진솔한 면모라고 해야 좀 더 정확하려나?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들은 연작이라는 형식적인 다리가 놓여있다. 그리고 종잡을 수 없는 글쓰기를 하는 그녀의 취향답게 연작이지만 시간의 순서는 가볍게 무시하고 있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수록된 단편의 대다수는 '누군가 사라진다'라는 것과 글쓰기의 계기 또는 배경이 공통된 제재로 쓰였다. '사라짐으로 해서 생겨난 공백을 글쓰기로 메운다'라는 아주 단순한 공식과도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책에 담긴 모든 단편을 아우르는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책의 제목이 힌트가 될 것 같다. <우연한 축복>이라는 제목처럼 각각의 단편에는 우연히 어떤 만남이 생겨 그로인해 축복처럼 좋은 일은 벌어진다. 그리고 그런 사건들의 이면에는 작가 오가와 요코의 진솔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단서가 포착된다.
우선 [실종자들의 왕국][도작][기리코의 실수][시계 공장]은 과거 또는 현실에서의 우연한 만남과 그것이 창작의 계기가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에델바이스] 역시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된 이야기로 그 만남의 흔적이 희미해질 무렵 기뻤던 과거의 추억과 조우하게 된다. 특이한 병명이 제목인 [누선수정결석증]도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뜻밖의 도움을 받는 이야기며 [소생]은 수많은 우연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우연의 향연'으로 의미심장했던 건 주인공 그녀가 우연히 말을 잃게 되고 그것을 다시 찾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녀는 갑자기 말을 하지 못하게 됐고 '무언' 속에서 과거에 썼던 말들이 벽이 돼버린 막막한 현실에 처하게 된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 하지만 역시 이 경우도 '우연한 무엇'으로 극복하게 된다.
지나칠 정도로 우연함이 넘쳐나는 이야기, 바로 이 소설이 그렇다. 하지만 우연이란 말처럼 우리 삶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도 없을 것이다. 학창시절 우연히 만난 친구들과 그 만남에서의 축복과도 같은 즐거운 추억, 우연히 일별한 이벤트의 참가와 당첨 등 우리의 일상 곳곳에 자리한 우연과 그 우연으로 파생된 축복과 같은 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쩌면 이 소설과의 만남도 또 다른 우연한 축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설의 만남과 더불어 또 하나의 우연한 축복을 들자면 이 소설을 통해 작가의 본모습을 조금이나마 추측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소설이므로 이 단편소설들이 모두 오가와 요코가 직접 경험한 일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확신하는 일은 위험하다. 그렇지만 소설 속 '그녀'가 어느 정도는 요코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맞는 것 같다. 특히나 내용 중에 <호텔 아이리스>를 언급한 부분이 있어 이 소설 어딘가에 분명 그녀의 삶 일부가 녹아있다는 사실에 무게를 실어준다.
<우연한 축복>을 들고 온 오가와 요코와 만남은 정말 즐거웠다. 은근슬쩍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같아 이국의 독자인 나에겐 참으로 행운처럼 느껴지는 책읽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제목 그대로의 느낌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다..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이 책을 읽고 우연히 이 시간에 서평을 쓰고 또 우연히 누군가 이 서평을 보게 되는 이 모든 일에 부디 축복이 함께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