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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모션
사토 다카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한순간 바람이 되어라>라는 젊음의 열정과 풋풋함이 느껴지는 성장소설을 통해 만나본 사토 다카코. 이번 작 <슬로모션> 역시 비슷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다만 <한순간>에 비해 다소 무게감있는 내용이 더해져 빠르게 읽히는 내용임에도 이따금씩 멈칫거리게 만드는 묘한 구석이 있어 더욱 흥미를 끄는 작품이다.
<슬로모션>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야기의 화자이자 엉뚱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오빠를 둔 가키모토 치사와 '슬로모션'한 동작으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아이들의 뒷담화 대상이 되는 '오이카와 슈코'그리고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유유자적하며 사는 치사의 오빠 가키모토 잇페이. 이 세 주인공의 관계의 변화와 감정의 기복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줄기라고 할 수 있다.
치사는 오빠인 잇페이를 무시하고 깔보며 미워한다. 사고 후 재활에 힘쓰지 않고 다리를 절룩거리는 것부터 흐물흐물한 태도로 뭐 하나 일다운 일을 하지 않는 오빠가 그저 거추장스럽고 보기싫은 것이다. 당사자인 잇페이 역시 동생에게 별다른 애정이 없다. 자신을 무시하는 동생의 태도를 잘알고 있거니와 가족 중 유일하게 자신과 소통이 될 만한 세대 임에도 그 기회 자체를 거부하는 동생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이렇게 한 집안에 살면서도 서로에 대한 마음이 닫혀있던 두 사람은 잇페이의 가출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게다가 가출한 잇페이는 뜻밖에 슈코의 집에 있었는데... 이로인해 치사는 슈코에 대한 질투와 함께 오빠로 부재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새삼 오빠라는 존재에서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 오빠인 잇페이 역시 그런 동생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슈코 또한 불우한 과거에 대한 방어기제로 사용했던 '슬로모션'한 생활에서 조금씩 활기를 찾아간다.
상대에 대한 문을 열고 서로를 배려하는 가운데 조금씩 소통해 나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잇페이와 슈코의 불안한 동거는 오래가지 못한다. 역시나 그들은 아직 부모 세대의 보호 속에 있어야 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해 이들 셋은 도망을 치지만 발이 정상이 아닌 잇페이는 쫓기다 넘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장면은 이들의 결별을 예견하고 있다.
하지만 그 결별을 통해 잇페이는 재활을 선택하게 된다. 여기서 잇페이가 능동적으로 원했던 재활은 끝까지 쇼코의 손을 잡아주지 못한 자신의 '불능'을 극복하고자 했던 긍정적인 노력으로 생각된다. 책은 쇼코의 뒷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은 채 여운을 남기지만 잇페이 못지 않게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