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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그림자의 책 ㅣ 뫼비우스 서재
마이클 그루버 지음, 박미영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셰익스피어, 그처럼 동서양을 막론해서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인정받고, 꾸준히 사랑받은 작가가 또 있을까? 하지만 인정과 사랑은 그가 창조해낸 작품들을 통해 얻어진 결과로 창조자인 그에 대해선 그 어떤 평가도 내릴 수 없다. 그에 대한 터무니없이 부족한 자료도 문제지만 예술작품에 대한 창조자의 '동기'나 '고뇌' 등을 깡그리 무시하는 경향도 배제할 수 없다.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대. 그가 연극을 위해 머리를 싸매며 써내려갔을 극본은 한시도 만족을 모르며 늘 새로운 것을 원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줄 무게도 없는 '바람과 그림자의 책'에 불과했으며, 현대에 발견된 그의 작품 또한 애석하게도 권위자의 명예를 위한 도구나 물질적 교환가치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적어도 이 책에 의하면 말이다.
하지만 예술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그런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아니, 될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미발표 희곡'의 가치는 그것이 얼마나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기쁨을 주고, 영화나 연극 등 또 다른 무언가로 재탄생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따져져야 한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파생되는 경제적 가치는 소수의 사람에게 막대한 이익을 줄 수도 있으나 모든 희소성 있는 물건이 그러하듯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는 항상 눈에 보이는 가치보다 우위에 있다. 이유는 그 파급효과 때문이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셰익스피어 미발표 희곡'이 당장 나에게 주는 이익이 무엇인가? 내가 그것을 발견하지도 않았는데 돈이나 명예를 얻을 순 없을 것이고, 오히려 배가 아프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작품을 읽고 나면 재미와 감동을 비롯한 많은 것을 느끼고, 또한 얻을 수 있다. 이런 점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바람과 그림자의 책>은 정말 흥미진진하게 이야기가 펼쳐진다. 팩션류의 대다수 소설이 그러하듯 의문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고, 제이크와 크로세티라는 각기 다른 인물이 중심이 되는 두 부류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또 그 사이에는 이 소설의 핵심이 되는 17세기 인물인 블레이스거들의 문제의 그 편지가 삽입되어 있다.
문제의 편지는 크로세티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몇몇은 암호화되어 있다. 단순히 오래된 편지로만 생각했던 그 편지가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희곡과 관계됐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명예회복을 노리는 교수와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찾던 갱단이 개입되면서 일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진실을 향한 모험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추적 그리고 온갖 배신과 음모 속에서 마침내 그 책의 진위가 밝혀지는데, 과연 셰익스피어의 미발표 희곡은 실재하는 것일까?
<바람과 그림자의 책>은 정말 쉼없이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 편지의 행방에 관한 것에서부터 소설 속 인물들의 삶 구석구석까지...
작가는 이 소설이 단순히 편지를 둘러싼 미스터리물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가족 내에서 막연한 소통의 부재를 느끼며 자신의 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 한 인간의 '제자리찾기'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그 수많은 외도를 불러온 억눌린 피해의식이 딸의 동정어린 행동으로 인해 마법에 풀린 공주처럼 그의 마음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오랫동안 쌓아온 감정을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은 그에게도 한없이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받을 가정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제이크의 변화는 빤한 한 얘기였음에도 적잖은 감동을 주었다.
진정한 '보물'은 먼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교훈을 주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