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의를 애써 감추고 있는 까칠하고 까다로운 문장을 번역할 땐 평소보다 많은 애정을 쏟아 원문을 살펴야 한다. 아무리 실력 좋은 번역가도 겉으로 보이는 문자만 보고 직역하다간 정반대의 오역을 내놓기 일쑤다. 남들은 오역하고 몰라주더라도 우리끼리는 좀 더 애정을 쏟아 서로의 원문을살펴야 하지 않을까.화가 들입다 많은 우리끼리는. - P20
중요한 건 여러 번의 계절을 나는 동안 지우가 용식을 깊이 봐온 것만큼 용식 또한 지우를 계속 지켜봤음을 지우에게 알려주는거였다. 서로 시선이 꼭 만나지 않아도, 때론 전혀 의식 못해도, 서로를 보는 눈빛이 얼마나 꾸준히 그리고 고요히 거기 있었는지 보여주는 거였다. 그러니까 말이 아닌 그림으로. 그렇게 그저 시점이 바뀐 것만으로 지우가 무언가 알아챘음 싶었다. 비록 그게 지우가 이미 아는 걸 한번 더 알려주는 거라 해도. 그런 앎은 여러 번 반복돼도 괜찮을 것 같았다. - P132
..... 그때 엄마 표정이 잊히지 않아. 내 손길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거절하는 것도 아닌 텅 빈 얼굴이었어. 이전만큼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게 된 얼굴. 얼핏 보면 삶을 다 이해한것 같고 또 다르게 보면 이해를 멈춘 얼굴 같았어.엄마가 그런 표정 짓게 해서 미안해. - P189
그 순간 소리는 엄마가 속삭이는 말을 들은 것만 같았다.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누군가를 잡은 손과 놓친 손이 같을 수 있다‘고. 소리의 두 눈에 어느새 물기가 어렸다. - P191
지우가 이해하기로 지우개는 뭔가를 없앨 뿐 아니라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대상에 빛을 드리우고 그림자를 입힐때 꼭 필요했다. 그 대상이 사물이거나 인물, 심지어 신일때조차 그랬다. 누구든 신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는 신의 얼굴을 조금 지워야 했다. - P200
지우가 따돌림당하던 당시 용식은 만화나 신화 속 멋진 용들과 달리 지우를 구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지우는 ‘때로 가장 좋은 구원은 상대가 모르게 상대를 구하는 것‘임을 천천히 배워나갔다. 실제로 그 시절 지우는 용식 덕분에 그나마 한 시절을 가까스로 건널 수 있었다. 용식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극적인 탈출이 아닌 아주 잘고 꾸준하게 일어난 구원. 상대가 나를 살린 줄도 모른 채 살아낸 날들. - P202
지우는 지금 자신이 상상하는 바다와 그날 엄마가 실제로 마주한 바다는 얼마나 같고 또 다를지 가늠했다. 그러곤 자신에게 태블릿 피시를 건네며 희미하게 웃던 엄마 얼굴을 떠올렸다. ‘내게 죽음이라는 가장 큰 거짓말을 남기고 떠난 엄마, 나를 위한다면서 바다 쪽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삶의 방향을 튼, 용서할 수 없는 엄마‘를. - P90
지우는 만화 속 ‘칸’이 때로 자신을 보호해주는 네모난 울타리처럼 여겨졌다. 둥글고 무분별한 포옹이 아닌 절제된 직각의 수용. - P118
이상한 사람을 피해 도망친 곳에 더 이상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게 나다. - P138
누가 어떤 SF를 이토록 슬프고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기발한 이야깃거리에, 페이지 한장 한장 넘어가는게 아쉬울 정도로 재미있고,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울고 웃고..당연하거나 어쩔수 없다고 넘겨버렸던 사실들에 아픈 물음표를 던져준,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이 강렬하게 박혀버렸다.다 읽고 덮은지 며칠이나 지난 지금도.
채운은 깊이나 높이에 대한 공포처럼 단순한 감각도 날 때부터 절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그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인간은 앉는 법과 서는 법, 물 삼키는 법까지 일일이 배워야 하는 존재였다. 어느 건 배워도 안 지키고, 알고도 실천 못하는. - P23
여러 번 허물을 벗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인 채 존재하는 기분은 어떨지 궁금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것은 버리고 어떤 부분은 간직하는지, 눈동자에 허물이 덮여 세상이 뿌옇게 보일 때면 무섭지 않은지도. - P59
소리는 그저 그 미소를 한번 더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바람이 어떻게 끝나는지, 혹은 어떤 시작과 다시 이어지는지 알고 싶었다. - P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