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한심한 시절’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어설프고 한심하고 그저 즐겁고 우스꽝스럽던 시절이. 그런 시절은 단순히 낭비된 시간이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자양분이 되는 시간이다. 사회적 기대나 압박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 인생에서 그리 길지 않다. 그래서 그때 느끼는 교감들은 여러 가지 득실 계산이 자연스레 개입하는 나이가 되면 절대 갖지 못한다. 그렇게 쌓인 청년기의 한심한 기억들은 놀랍게도 성년기를 위한 완충지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지칠때마다 그 충격들을 완화해 주는 두꺼운 스펀지처럼. 그러니 너무 건설적으로만 살려고 아등바등할 것 없다. 목적 없이 흘려보낸 한심한 시간이 역설적으로 언젠가 가장 쓸모 있는 기억이 되기도 하니까. - P147

자식들은, 특히나 궁하게 자란 자식들은
그저 부모의 인생이 불행했을 거라고 넘겨짚는다.
하지만 부모의 인생은 부모의 인생대로 희로애락이 있었을 거다.
어떻게 나는 그 시절을 한번 물어볼 생각도 않고
당신의 불행을 멋대로 단정했을까. - P167

반복된 농담이 사회적 인식을 형성하는 과정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 이 밑도 끝도 없는 확증 편향의 반복이 결국 결혼을 지옥으로 보이게 한다. - P174

생각해 보면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보통 셋이 이야기할 때 둘이서 다른 한 명을 철저히 무시하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린 너무나 당연하게 아이 앞에서 이렇게 대화해 왔다. 아이가 대화를 알아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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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자기 의심이 많은 사람은 자괴감에 시달릴 때면 평소보다 나를 더 모질게 괴롭힌다.

‘네가 지금껏 한 게 뭐가 있느냐, 네 능력이라 봐야 고작 이 정도다, 네가 해 온 일들은 아무 가치도 없다, 주제 넘는 꿈꾸지 말고 관둬라‘

그럼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나는 그 얘길 곧이곧대로 믿으려 든다. 아마도 모든 죄를 자진해서 뒤집어쓰는 자기혐오가 내 일이 안 풀리는 까닭을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일 거다. 단순히 내가 못났기 때문이라고 해 두면 고민할것도 괴로워할 것도 없다. 그대로 놓아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지금까지의 여정을 심하게 오역해 버린다. 내가 쌓아 온 것들을 까맣게 잊고 그저 나를 탓한다. 그게 쉬우니까. 나를 때리는 게 가장 만만하니까. - P46

분명 계획대로 뚜벅뚜벅 가고 있으면서도 가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며 의도적으로 내 여정을 오역했다. 지쳐서, 다 놓고 쉬고 싶어서. 다시 내 원문을, 내 여정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정역해 봐야 그 정역이 너무나 보잘것없을 게 뻔하니까. 또 그 정역에 실망할 게 뻔하니까.
맞다. 그렇게 나온 정역은 궁색하고 보잘것없고 대단찮다. 그런데도 결국 날 붙들어 주는 건 그 볼품없이 왜소한 정역이다. - P47

실체도 없는 깊이를 추구하려다 자살을 택한 화가의 강박, 애초에 그 강박을 떠안긴 평단과 대중은 외려 작가에게 어리석은 강박이 있었다며 책임을 떠넘긴다. 아니, 책임을 떠넘기는 게 아니라 애초에 책임을 자각하지도 못한다. "이 화가의 후기 작품에서는 깊이를 향한 강박이 보인다."라는 문장은 가해자가 가해를 자각하지도 못하고 피해자를 동정하는 잔인한 모순을 단 한 줄로 완벽하게 완성한다. - P82

애초에 그 길을 택한 이유는 모두가 인정하는 눈부신 결과를 내고자 함이 아니라 그저 그 길을 걷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존은 그 길에 인생을 걸지 않아서, 혹은 영혼을 바치지 않아서 안 풀린 게 아니다. 존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생의 전부를 갈아 넣어 왔다. 문제는 이미 하루하루 어린시절 자기의 맹세를 지키며 살아왔음에도, 자꾸만 모두가 나만 빼고 나아가는 것 같으니 그 조급함에, 결과에 집착하게 된 것뿐이다. - P106

열심히 하면 높은 확률로 뭐든 되기는 된다. 그런데 그 ‘열심’이라는 게 반드시 올인일 필요는 없다. 그렇게 무턱대고 영혼을 갈아 넣어 성공했다는 사람들도 사실은 그 정도까지 올인한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미디어에서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말라고 하고 싶다. 꿈을 향해 날아가려면, 역설적이지만 반드시 현실이라는 땅에 한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 부디 영웅담 같은 것들에 휘둘리지 않으면 좋겠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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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를 애써 감추고 있는 까칠하고 까다로운 문장을 번역할 땐 평소보다 많은 애정을 쏟아 원문을 살펴야 한다. 아무리 실력 좋은 번역가도 겉으로 보이는 문자만 보고 직역하다간 정반대의 오역을 내놓기 일쑤다. 남들은 오역하고 몰라주더라도 우리끼리는 좀 더 애정을 쏟아 서로의 원문을살펴야 하지 않을까.

화가 들입다 많은 우리끼리는.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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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여러 번의 계절을 나는 동안 지우가 용식을 깊이 봐온 것만큼 용식 또한 지우를 계속 지켜봤음을 지우에게 알려주는거였다. 서로 시선이 꼭 만나지 않아도, 때론 전혀 의식 못해도, 서로를 보는 눈빛이 얼마나 꾸준히 그리고 고요히 거기 있었는지 보여주는 거였다. 그러니까 말이 아닌 그림으로. 그렇게 그저 시점이 바뀐 것만으로 지우가 무언가 알아챘음 싶었다. 비록 그게 지우가 이미 아는 걸 한번 더 알려주는 거라 해도. 그런 앎은 여러 번 반복돼도 괜찮을 것 같았다. - P132

..... 그때 엄마 표정이 잊히지 않아. 내 손길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거절하는 것도 아닌 텅 빈 얼굴이었어. 이전만큼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게 된 얼굴. 얼핏 보면 삶을 다 이해한것 같고 또 다르게 보면 이해를 멈춘 얼굴 같았어.


엄마가 그런 표정 짓게 해서 미안해. - P189

그 순간 소리는 엄마가 속삭이는 말을 들은 것만 같았다.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누군가를 잡은 손과 놓친 손이 같을 수 있다‘고. 소리의 두 눈에 어느새 물기가 어렸다. - P191

지우가 이해하기로 지우개는 뭔가를 없앨 뿐 아니라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대상에 빛을 드리우고 그림자를 입힐때 꼭 필요했다. 그 대상이 사물이거나 인물, 심지어 신일때조차 그랬다. 누구든 신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는 신의 얼굴을 조금 지워야 했다. - P200

지우가 따돌림당하던 당시 용식은 만화나 신화 속 멋진 용들과 달리 지우를 구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지우는 ‘때로 가장 좋은 구원은 상대가 모르게 상대를 구하는 것‘임을 천천히 배워나갔다. 실제로 그 시절 지우는 용식 덕분에 그나마 한 시절을 가까스로 건널 수 있었다. 용식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극적인 탈출이 아닌 아주 잘고 꾸준하게 일어난 구원. 상대가 나를 살린 줄도 모른 채 살아낸 날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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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는 지금 자신이 상상하는 바다와 그날 엄마가 실제로 마주한 바다는 얼마나 같고 또 다를지 가늠했다. 그러곤 자신에게 태블릿 피시를 건네며 희미하게 웃던 엄마 얼굴을 떠올렸다. ‘내게 죽음이라는 가장 큰 거짓말을 남기고 떠난 엄마, 나를 위한다면서 바다 쪽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삶의 방향을 튼, 용서할 수 없는 엄마‘를. - P90

지우는 만화 속 ‘칸’이 때로 자신을 보호해주는 네모난 울타리처럼 여겨졌다. 둥글고 무분별한 포옹이 아닌 절제된 직각의 수용. - P118

중요한 건 여러 번의 계절을 나는 동안 지우가 용식을 깊이 봐온 것만큼 용식 또한 지우를 계속 지켜봤음을 지우에게 알려주는거였다. 서로 시선이 꼭 만나지 않아도, 때론 전혀 의식 못해도, 서로를 보는 눈빛이 얼마나 꾸준히 그리고 고요히 거기 있었는지 보여주는 거였다. 그러니까 말이 아닌 그림으로. 그렇게 그저 시점이 바뀐 것만으로 지우가 무언가 알아챘음 싶었다. 비록 그게 지우가 이미 아는 걸 한번 더 알려주는 거라 해도. 그런 앎은 여러 번 반복돼도 괜찮을 것 같았다. - P132

이상한 사람을 피해 도망친 곳에 더 이상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게 나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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