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처럼 자기 의심이 많은 사람은 자괴감에 시달릴 때면 평소보다 나를 더 모질게 괴롭힌다.

‘네가 지금껏 한 게 뭐가 있느냐, 네 능력이라 봐야 고작 이 정도다, 네가 해 온 일들은 아무 가치도 없다, 주제 넘는 꿈꾸지 말고 관둬라‘

그럼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나는 그 얘길 곧이곧대로 믿으려 든다. 아마도 모든 죄를 자진해서 뒤집어쓰는 자기혐오가 내 일이 안 풀리는 까닭을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일 거다. 단순히 내가 못났기 때문이라고 해 두면 고민할것도 괴로워할 것도 없다. 그대로 놓아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지금까지의 여정을 심하게 오역해 버린다. 내가 쌓아 온 것들을 까맣게 잊고 그저 나를 탓한다. 그게 쉬우니까. 나를 때리는 게 가장 만만하니까. - P46

분명 계획대로 뚜벅뚜벅 가고 있으면서도 가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며 의도적으로 내 여정을 오역했다. 지쳐서, 다 놓고 쉬고 싶어서. 다시 내 원문을, 내 여정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정역해 봐야 그 정역이 너무나 보잘것없을 게 뻔하니까. 또 그 정역에 실망할 게 뻔하니까.
맞다. 그렇게 나온 정역은 궁색하고 보잘것없고 대단찮다. 그런데도 결국 날 붙들어 주는 건 그 볼품없이 왜소한 정역이다. - P47

실체도 없는 깊이를 추구하려다 자살을 택한 화가의 강박, 애초에 그 강박을 떠안긴 평단과 대중은 외려 작가에게 어리석은 강박이 있었다며 책임을 떠넘긴다. 아니, 책임을 떠넘기는 게 아니라 애초에 책임을 자각하지도 못한다. "이 화가의 후기 작품에서는 깊이를 향한 강박이 보인다."라는 문장은 가해자가 가해를 자각하지도 못하고 피해자를 동정하는 잔인한 모순을 단 한 줄로 완벽하게 완성한다. - P82

애초에 그 길을 택한 이유는 모두가 인정하는 눈부신 결과를 내고자 함이 아니라 그저 그 길을 걷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존은 그 길에 인생을 걸지 않아서, 혹은 영혼을 바치지 않아서 안 풀린 게 아니다. 존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생의 전부를 갈아 넣어 왔다. 문제는 이미 하루하루 어린시절 자기의 맹세를 지키며 살아왔음에도, 자꾸만 모두가 나만 빼고 나아가는 것 같으니 그 조급함에, 결과에 집착하게 된 것뿐이다. - P106

열심히 하면 높은 확률로 뭐든 되기는 된다. 그런데 그 ‘열심’이라는 게 반드시 올인일 필요는 없다. 그렇게 무턱대고 영혼을 갈아 넣어 성공했다는 사람들도 사실은 그 정도까지 올인한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미디어에서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말라고 하고 싶다. 꿈을 향해 날아가려면, 역설적이지만 반드시 현실이라는 땅에 한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 부디 영웅담 같은 것들에 휘둘리지 않으면 좋겠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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