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거야. 받을 줄 알기. 이 프레스코화가 말하는 것은 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거야. 위대하고 아름다운 일을 해내기 위해선 인간 본성이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지. 타인의 호의를, 기쁨을 주고자 하는 타인의 욕망을 맞아들이기, 자기가 아직 갖고 있지 않은 것, 자기가 아직 될 수 없는 것을 맞아들이기, 받은 걸 돌려줄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거야. 하지만 돌려주려면, 즉 다시 주려면 반드시 먼저 받을 수 있어야 한다. - P44

삶은 쓰라림을 받아들일 때만 가치가 있음을, 그리고 쓰라림이 일단 시간의 체에 걸러지고 나면 비옥한 재료를, 아름답고 유용한 물질을 드러내 진짜 삶이 되게 해준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 P46

저렇게 훈훈한 미소를 짓는 여자의 형상은 똑같이 미소를 지으라는 권유인 셈이야. 바로 그게 화가가 전하려는 에너지란다. 삶에 열려 있기, 삶에 미소 짓기,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 것, 아직 모호하고 형태가 갖춰지지 않은 것, 황량하고 혼돈한 세계를 맞이하는 순간에도 말이지. 그것이야말로 세계에 행복한 질서를 흘려넣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야. 또한 그 행복이 발코니를 등지고 앉은 어느 르네상스 시대 여자의 굉장하고 신비로운 행복에 그치지 않고 인류 전체의 행복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해 - P56

‘어떤 이가 놀이를 멈추는 것은 언제일까?‘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야기 속 배역을 연기하는 이 성향은 어떤 문턱을 넘으면서, 어떤 나이에서 끊기는가? 다른 세계 속으로 수월하게 들어가는 능력,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성채로, 미국 서부의 개척지로, 우주선으로 변신시키는 능력이 작동을 멈추는 것은 어느 시점부터인가? - P77

행복과 불행, 영원한 영광과 끝없는 애도의 묘하고 역설적인 뒤섞임이랄까.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그 점을 깊이 이해했지. 훌륭한 시인이었던 그는 언젠가 이런 시구를 쓰기도 했어. ‘우울은 나의 기쁨.’ - P83

질료로부터, 구체적이고 만질 수 있는 세계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거야. 이 육체는, 이 전율하는 육체는 삶이라는 방황을 떠나 저세상의 이상적인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어. 마치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로운 인간의 신분으로 넘어가듯이, 마치 무정형의 대리석 덩어리에서 조각의 장려함으로 넘어가듯이 세 가지 과정 모두 세계의 질료, 거칠고 무겁고 인간을 소외시키는 질료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인데, 그게 한꺼번에 이뤄지면서 기쁨과 고통이 뒤얽히는 무섭고도 숭고한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거지. 그건 하나의 해방이야. - P84

미켈란젤로는 형상이 대리석 덩어리 속에 이미 존재한다고 즐겨 말했단다. 그 형상을 드러내기만 하면 된다고, 허물을 걷어내 형상이 나타나게만 하면 된다고. 질료의 혼돈 속에 이미 정신과 이상이, 순수 상태의 작품이 깃들어 있다는 거지. - P85

"있죠 엄마, 아빠는 언젠가 자기 문제들을 다른 걸로 바꿀 수 있을 거예요. 대단한 이야기를 한 편 만들 수도 있죠! 책이나 영화에는 언제나 슬픔과 불행이 있는데 그걸 잘 엮어서 얘기하면 아름다워져요.…" - P87

‘나 역시 아르카디아에서 살았다.‘ 예술사가들은 그 ‘나‘가 누군지에 대해 많은 논의를 했어. 이 말을 하는 건 죽은 사람, 무덤 저편에 있는 자인가? 이 경우 그 문장은 일종의 고백인 셈이야. 죽은 목동이 비문의 형식으로 아르카디아의 자기 동료들에게 삶이 짧다고 예고하는 것이지. 아니면 그건 죽음 자체의 말인가? 그 경우 문장은 죽음이 온 천지에서 활약중이라고 경고하는 것이 돼. 언젠가 자신이 사라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이들의 목가적인 고장도 예외가 될 수 없고. 이 작품의 도덕적 의미는 무척 분명하단다. 아르카디아의 목동들이 알게 되는 것은, 그들의 삶이 아무리 기막히도록 즐겁고 무사 태평해도 삶이란 결국 끝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야. - P129

예술 작품에 자연적인 일과 초자연적인 일을 일관되고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함께 담아내기. - P140

그는 미묘함을 택했어. 그가 보여주는 건 잿빛, 흰색, 검은색의 명암 차이를 제외하면 색채라곤 전혀 없는, 극도로 소박한 순간이지. 이 절제야말로 안선주의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신에 복종하는 정신을 표현하고 루이 14세 왕정이 내세우는 호화로움과 대비를 이루는거야."

"항상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렇죠, 하비?"

"그게 이 작품의 의미란다, 모나야. 덧붙이자면 더 훌륭한 건, 카트린을 위해 기적을 믿은 사람이 아녜스였다는 사실이야. 카트린이 자기 자신을 위해 기적을 믿은 게 아니라." - P141

"하비, 저 <피에로>는 너무 슬퍼요...... 저렇게 발개진 코랑 뺨이, 방금까지 울다 나온 것 같아요...... 우리가 그를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말해줄 수 있을까요?"
"지금 너처럼 그를 바라봐주면 된단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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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불꽃놀이 기술, 아니면 헛바람이야." 그는 작품 전체를 통해서건 하나의 디테일을 통해서건, 한 폭의 그림, 한점의 조각, 한 장의 사진이 존재의 감각을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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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불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훗날 행운으로 변한 것이 꽤 있는 걸 보면, 살아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어제의 일들 ㅣ 정소현 - P329

차마 다 기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것들은 명백히 지나가버렸고, 기세등등한 위력을 잃은 지 오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다행이라 말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 어제의 일들 ㅣ 정소현 - P357

어쩌면 그들은 정말로 세계에서부터 분실된 존재들인지도 몰랐다. 동의 없이 그들을 이 세계로 밀어내고는 향유할 기억과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간 뒤 결국엔 이 어두컴컴한 병원 로비에 방치한 그 최초의 분실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자의 잔인함에 가까운 무신경을, 끝까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게으름을, 뒤늦게라도 그들에게 이야기를 되돌려주지 않는 고집스러움까지, 그 모든 것을…… - 사물과의 작별 ㅣ 조해진 - P378

사랑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타자일 수밖에 없었던 고모의 긴 인내의 시간은 미안하다는 말과 잊어달라는 부탁으로 끝났다. 고작, 그뿐이었다. - 사물과의 작별 ㅣ 조해진 - P379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그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피륙이 있고 그것의 무늬는 대개 이런 꼴로 짜이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 - 웃는 남자 ㅣ 황정은 - 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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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처음 보았을 때 바이 부레는 황홀감 대신 허탈감을 느꼈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는 돌덩이를 차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전쟁은 프리미어리그의 축구 경기만큼이나 이해되지 않았다. 비록 자신에게 실습용으로 주어진 건석탄을 압축해서 만든 인조 다이아몬드였지만 마치 조상의 뼈와 살을 깎고 있다는 생각에 오금이 저리고 구토가 밀려와 작업대 앞에 채 10분을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 ㅣ 김솔 - P207

형태가 쓸모를 발명하거나, 쓸모가 형태를 제한한다는 믿음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형태와 쓸모 때문에 제품을 선택하는 소비자는 거의 사라졌다. 대신 소유의 욕망만이 제품의 가치를 결정하고 그 이후 습관이 소비를 추동할 따름이다. (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 ㅣ 김솔 ) - P215

영국축구협회는 프리미어리그 구단들이 아프리카에서 유괴하다시피 데리고 온 소년들을 정당한 계약서도 없이 유소년 클럽에 가입시킨 뒤 혹독한 훈련을 통해 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는데도 인권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 게다가 전쟁을 방불케 하는 훌리건들의 난동을 예방하기 위한 규칙들을 추가하고 경기장 안팎에 엄중한 경고문들을 내거는 일에 지극히 소극적이다. 프리미어리그 구단들은 살인적인 경기일정을 소화하느라 부상을 당하는 선수들의 재활 프로그램에 큰 관심이 없다. 다국적 스포츠용품 업체는 프리미어리그를 후원하고 스타들에게 막대한 광고료를 지불하지만 정작 축구공과 유니폼의 제작원가를 낮추기 위해 저개발국가의 아이들의 노동력을 동원한다. 축구공은 둥글지만 결코 평평한 바닥을 구르는 것은 아니다. -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 ㅣ 김솔 - P218

때때로 무엇인가를 붙잡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삶이, 그녀 앞에 놓인 삶이 버둥거림의 연속이고, 또한 기도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 제발 내가 또다시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게 도와주세요. 그녀는 얼마나 자기 자신이 기도를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던가. - 임시교사 ㅣ 손보미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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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모든 게 그랬다. 모두 다 불투명하고 불확실하다는 것만이 진리였다. 눈앞을 죄다 가리는 돔 하늘과 황사는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믿을 수 없는 건 나 자신이었다. - P135

희망이 없으면 자유도 없어. 있더라도 막막한 어둠처럼 아무 의미나 무늬도 없지.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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