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소설들을 쓴 수천의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등신대의 회색 종이 앞에 서서 한 줄씩 점을 뚫었을 것이다. 생존한 사람들은 지금도 그 앞에 서 있을 것이다. 그 일에 고통을 느낄 때도 있고, 충일감이 더 클 때도 있을 것이다. 한순간 깨끗한 생명이 차오르며 기쁨을 느낄 것이다. 건너가야 할 생각의 고리들, 꿰뚫어지지 않는 감정 때문에 서성거릴 것이다. 퀼트를 짜거나 건축물을 설계하듯 오 년, 십 년,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소설 한 편에 골몰해 보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시간이 지워지고 있을 것이다. 늙어가고 있을 것이다. - P314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그의 책상을 찍은 사진이 신문에 실린 것을 보았다. 원고지 묶음, 준비중이던 장편소설의 자료들, 돋보기 안경. 작가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 무섭게 깨달았다. 새 소설의 자료 준비를 끝냈지만, 이제 쓸 일만 남았지만 쓸 수 없다. 머릿속에선 이미 시작되었을 그 책이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 - P321
그리고 그 녹찻잔을 생각한다. 깨어졌어도 아름다운 조각들을 들여다보며 한참 쪼그려앉아 있었던, 어두운 줄도 모르고 어두웠던 그 시절에, 내 책상으로 최인호 선생님이 가볍게 걸어왔던 것을. 담담한 진실을 담은 눈으로 내 눈을 건너다봤던 것을. 나는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니? 네가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 - P322
그해 여름이 지나갈 무렵 내가 문득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제 곧 이 무더운 여름이 끝나고 우리는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 여름으로조차 끝내 넘어오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어떤 정치적 각성이라기보다,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 P327
그러므로 만일 지금 누군가 나에게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폭력보다 먼저, 인간의 참혹보다 먼저, 6장에서 어린 동호가 엄마의 손을 잡고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고 느낀다. - P332
그 열두 살의 나에게, 이제야 더듬더듬 나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이야말로 열쇠이며 단단한 씨앗이라고. - P335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빛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뎌야만 하는 순간을 기도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아마 이 프로젝트는 백 년 동안의 긴 기도에 가까운 어떤 것이라고 이 순간 나는 느끼고 있습니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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