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누이, 다경
서미애 지음 / 한끼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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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여우누이다경 #서미애 #한끼


⭐ 가족의 틈 사이로 들어온 트로이 목마


* 오랜만에 한국 소설이 읽고 싶었다.

평소처럼 호흡이 긴 글이 아닌,

300페이지 안쪽의 속도감 있는 이야기가 그리웠다.

처음에는 사극 로맨스를 뒤졌으나

하나같이 두께가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르다 운명처럼 만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 '여우 누이' 설화는 익히 알고 있다.

간절한 기도 끝에 태어난 귀한 딸이

가축들을 죽이고, 결국 오라비가 던진

호리병에 최후를 맞이하는 이야기.

그렇다면 현대판 변주곡인 <여우 누이, 다경>은

이 고전 설화와 얼마나 닮아 있고,

또 어디서 궤를 달리할까?


* 책은 첫 문단부터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예고 없이 벌컥 열린 문, 자신의 공간을

침범당했다는 큰아들 민규의 짜증과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엄마.

어쩜 엄마들의 모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토록 닮아 있을까.


* 민규와 엄마 세라의 다툼도 잠시,

가족은 아빠 정환의 절친인

경호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넋이 나간

아빠도 걱정이었지만,

민규는 홀로 남겨진 경호의 딸

다경에게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천애고아가 된

다경 주변에는 위로 대신 유산 이야기만 속삭이는 친척들뿐이었다.


* 결국 다경은 '당분간'이라는 전제하에

정환의 집에 들어오게 된다.

둘째 선규는 상의도 없이 자신의 방을 내준

엄마에게 분노하지만, 자신의 짜증 때문에

다경이 울었다는 소식에 이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딸 없는 집에 딸 같은 존재가 생긴 세라,

친구의 딸을 거두었으나 묘한 불편함을 느끼는 정환.

그렇게 다경은 한 가족 사이에 스며든

'트로이 목마'가 되어 조용히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


* 각 인물의 시점이 교차하며 서술되는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뚜렷한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지 않는다.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가해자가, 또 누군가는 피해자가 된다.

다경의 행동 역시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 대한 '벌'이자 '복수'라는 측면에서

권선징악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행보가 전적으로

정의롭다고 단언하기엔 무리가 있다.


* 다경이 가족을 박살 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집에는 그녀가 오기 전부터

보이지 않는 틈과 상처들이 존재했다.

한솥밥을 먹는 가족임에도 부모와 자식,

부부 사이에 숨겨진 갈등은 깊었고,

다경은 그저 그 틈을 정교하게 파고들었을 뿐이다.

다만 빠른 전개 탓에 장면 전환이

다소 급격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특히 민규의 병원 장면 전에 서사를

쌓아줄 에피소드 하나만 더 있었다면 완벽했을 것 같다.


* 설화의 현대적 해석이면서 동시에

전혀 색다른 여우 누이의 탄생이다.

피 튀기는 묘사 없이 말과 행동만으로

서늘한 공포를 선사한다.

가장 현실적인 여우 누이의 모습을 통해,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여우

한 마리씩은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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