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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불가마
정소정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12월
평점 :

* 나무옆의자 출판사에서 받아본 책이다.
작년 한 해는 내 최악의 해였다고 할 수 있었다.
반려 동물의 암수술과 재수술,
기나긴 회복 기간과 나를 덮친 교통사고.
여기에 비상계엄령과 제주항공 무안공항 사고까지.
심장이 몇 번이나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 특히 작년 12월 한 달은 아침에 눈 뜨면
뉴스로 시작해서 뉴스로 끝나는 일상이었다.
지쳐갔다. 사고 희생자와 그 유족 분들에게
비할 바는 못되지만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만 갔다.
그때, 구원처럼 이 책을 만났다.
삶에 지친 당신에게 보내는 한 장의 목욕권.
불가마에서 무슨 위로를 받는건가, 싶기도 했지만
지친 나는 동앗줄처럼 이 책을 집어들었다.
* 29살, 안주연.
삶의 주인공이 되라는 뜻에서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지만 주연보다는
조연이었던 날들이 더 많았던 인생이었다.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정규직 전환에 떨어지고
남은 것이라고는 값싼 월세방 뿐이었다.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했지만 수도관 파열.
세상은 주연이한테 무슨 억한 심정이 있길래
이렇게 까지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 그때 전 주인이 남기고간 목욕권을 발견하고
여기서라도 씻자고 생각한 주연은
여성전용 불가마 미선관이라는 낡은 간판과
천 년은 묵은 듯한 낡은 벽돌 건물과 마주한다.
잠시 머뭇거리는 찰나, 머리 위를 맴도는
까마귀 떼 덕분에 안으로 발을 들이 밀었다.
"막하러 오셨어요?" 라는
카운터에 앉은 늙은 여자의 말을 시작으로
주연의 인생은 점점 달라지기 시작한다.
* 미선관에는 주연 말고도 여러 언니들이 있었다.
미선관의 주인인 대장 언니와 카운터를 맡고 있는
카운터 언니, 이 외에도 강남 언니, 액세서리 언니,
손님으로는 이쁜 언니와 얼음 언니 등이 있었다.
같이 땀을 흘려서일까...?
이들은 가족보다 더 끈끈한 전우애로
똘똘 뭉친 무리처럼 보였다.
* 속내는 잘 털어놓지 않지만, 누구든 부담없이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 하고 들어줬다.
때로는 해결책을,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도와주며
그들은 그렇게 불가마의 막에서 오래 묵은
때도 벗기고, 상처도 씻어내며
단단한 도자기로 거듭날 준비를 했다.
* '막' 하는 법을 배우면서 뿔 언니라는
별명이 생긴 주연.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대화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처와 이별 이야기인데도
이들을 바라보는 게 어찌나 흐뭇하던지.
별 일 없이 산다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걸
느끼는 요즘, 오랜만에 미소가 띄워지는 책이었다.
* 사실 나는 목욕탕이라는 공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어렸을 적 교통사고로 인해 몸에
큰 수술 자국이 몇 개 있다.
때 빼고, 광낸 후에 엄마가 쥐어주는
바나나 우유가 좋아서 따라다녔었는데
내 몸은 오지랖 넓은 아줌마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 '어린 애가 무슨 수술 흉터가 이렇게 있대~' 라며
예고도 없이 만져대는 손길과
딸을 지키지 못했다라는 죄책감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떨구던 엄마를 보는 게 너무 힘들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목욕탕은 쳐다도 안봤다.
그래서인지 찜질방도 가본 적이 없다.
*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이제는
찜질방도 목욕탕도 가고 싶다는 용기가 생겼다.
시원한 식혜 한 사발 앞에 두고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 떠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 책을 읽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것만으로도 천국을 맛 본 기분이었다.
언젠가는 꼭! 이 책을 들고 목욕탕에 가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