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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수프만 생각했다
요시다 아쓰히로 지음, 민경욱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입도 하나밖에 없고, 사람들이 먹고 싶어 하는 것도 하나밖에 없으니까."
"하나밖에?"
"맛있는 것." <p.78>
맛있는 제목과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에 반해 읽게 된 요시다 아쓰히로의 <그 후로 수프만 생각했다>
교외 주택가에 어울리는 두량짜리 작은 노면전차가 천천히 달리고 있고,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이웃 역 근처에 학생 때부터 자주 다녔던 오래된 영화관이 있어 이 마을로 이사오게 된 오리군.
실업의 몸인지라 되도록 빨리 일을 찾아야만 하지만 바로 이웃 역의 영화관으로 저절로 발길이 향하는 남자다.
영화뿐 아니라 푹 빠지면 반복하는 버릇은 먹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먹을 때마다 맛을 더해가는 트르와의 샌드위치를 매일 빠짐없이 먹게 된 오리군은 그 인연으로 트르와에서 일하게 되고 날이 추워지면서 손님도 줄고 신제품 개발 차원으로 샌드위치에 어울릴만한 수프를 만들라는 안도씨의 부탁으로 수프 만들기에 최선을 다하게 되는데 . . .
그는 맛있는 수프를 만들 수 있을까 ? 그 수프는 어떤 맛일까 ?
아들 리쓰군의 표현을 따르자면 너무 성실해서 재미가 없는 <트르와>라는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안도씨. 키가 작고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말하는 것만 보면 굉장히 어른스러워 아버지도 당해내지 못하는 똘똘한 초등학교 4학년. 안도씨의 아들 리쓰군.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를 찾아 상영하는 곳만 있으면 시간을 내서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는 '안절부절 못하는 병'에 걸려 회사까지 그만두게 된 우리의 주인공 오리군. 오리군이 살고 있는 곳의 집주인이자 건물 꼭대기에서 혼자 살고 있는, 옛날 프랑스 영화에 나오는 안뜰과 다락방이 딸린 낡은 아파트에 사는 마담처럼 전혀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 데다 호탕한 면이 있는 다락방 마담 오야씨.
우리의 주인공 오리군이 첫눈에 반한 배우 마쓰하라 아오이씨. 개만 남기고 떠나버린 지배인, 주인이 떠난 극장을 지키는 팝콘을 파는 청년과 개 한 마리까지.
시종일관 음식 이야기, 그 중에서도 <수프>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룰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다르게 평범하지만 사랑스러운 이웃들이 들려주는 소박하지만 맛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읽고 있는 내내 잔잔한 미소가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방세와 상관없이 옆에 세워져 있는 교회의 하얀 십자가가 창을 통해 곧바로 보이는 모습, 엷은 구름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햇살이 십자가를 부드럽게 떠받치고 있는 것 같은 광경에 짧은 탄성과 함께 한동안 넋을 잃은 주인공의 행동에 당연히 '여자'일거라 생각했는데 '남자'라니~ 거기서부터 책읽는 내내 예기치못한 즐거움과 만나게된다.
첫번째로 빵 터진건 샌드위치 가게 이름 때문. 맛있단 얘길 듣고 찾아간 샌드위치 가게 '트르와'. 꽤 맛있는 정도가 아니라 인생이 바뀔 정도의 맛인지라 오리씨는 트르와를 자주 찾게 되는데 몇번의 방문후 우연찮게 주인 안도씨의 아들 리쓰군으로부터 트르와의 뜻을 듣게 되는 장면이다.
(트르와는 프랑스어로 3인데 (여기까진 괜찮았다 ㅋ) 안도집안. 안(Un), 도(Deux), 트르와(Trois), 프랑스어로 1,2,3이라 뜻이라고 ㅋ
안도씨라 가게 이름이 트르와란 얘기에 빵 터진 웃음은 그칠줄 몰랐다. 곧이어 두 번의 실패후 세 번째 일터. 세번의 도전이라는 제법 진지한 설명도 들었지만 배꼽잡고 웃은 후라 그런지 별로 귀에 안들어오더라는 ㅎㅎ)
트루와의 맛있는 샌드위치 얘길 하다 영화 이야기로 빠지기도 하고, 수프 이야기를 하다가 공중돌기나 티비 이야기, 태엽감는 시계 이야기로 빠지는 것처럼 편해서 정감있고 엉뚱해서 즐겁다.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결코 가볍지 않은 - 주인공들이 가슴 속에 안고 있는 삶의 무게와 조언이 그대로 녹아 내려있어 좋다.
왜 그런지, 아직 내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모두 자진해서 감상을 말하려고 했다.
평소에는 내가 이리저리 캐물어야 겨우 대답이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스푼을 입에 넣을 때마다 맛있다, 정말 좋다 같은 얘기들이 연달아 나온다.
맛있다는 것은 아마 그런 것이리라.
정말 맛있는 것은 말을 찾을 필요도 없이, 목구멍을 통과하는 순간에 이미 감탄의 소리가 나오고, 위에 도달할 무렵에는 꽃이 피는 것처럼 말이 용솟음친다.
"이건, 엄마의 맛이네요." <p.171>
평범한 일상속 사람들의 감정을 솔직담백하게 담고 있어 소중한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단 생각이 간절해지는 이야기 +_+
추운 겨울, 트르와의 맛있는 샌드위치와 수프는 물론 우리네들의 소박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세용~
<그후로 수프만 생각했다>는 <회오리바람 식당의 밤>의 자매소설로 '쓰키부네초 3부작'의 두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쓰키부네 시네마 로비에 남겨진 개를 주인공으로 한 <레인코트를 입은 개>라는 작품을 준비중이란 얘길 들었는데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
이 책이 좋은 진짜 이유 !!
네 번째 <휘파람>
영화는 지극히 단순하다. 이렇다 할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무대도 장면도 크게 바뀌지 않는다.
(중략)
이 영화는 옛날 레코드판으로 치자면 B면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오이 씨뿐만이 아니라 출연자 대부분이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질 만큼 평범한 연기이긴 하지만 지금 시점으로 보면 왠지 리얼리티가 살아 있어서 반세기 전의 서민 생활에 어느새 나 자신도 푹 빠지고 만다.
벌써 완전히 잊었지만 나는 언젠가 영화 대본을 쓰고 싶어 했던 적이 있다. 그것은 어쩌면 이 <휘파람>같이 지극히 평범한 마을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움직임도 없지만 그래도 역시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이 있는,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해가는 것 사이에서 무력한 마을 사람들은 종종 길을 헤매다 말을 잃는다. <P.211>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게 이런게 아닐까 싶은 ~
예전엔 재밌거나 슬프거나 감동적이거나 반전이 강한, 나름 주제의식이 강한 이야기를 읽어야 머릿속이 깔끔해지면서 책 한권을 끝냈다 싶어 좋았는데 요즘은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다룬 책들이 좋아진다.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세세한 감정들을 글로 만났을때 느껴지는 아름다움, 평범한 삶속에 숨겨진 진짜 '행복'을 깨우치게 된달까.
평범하지만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중한 이야기를 많이 만나고 싶다.
개인적으로 요런 스타일의 일러스트를 참 좋아함.
어딘가 낯익다 싶었는데 치즈랑 소금이랑 콩이랑의 박경연님 작품이더라는 ~
스타일이 맘에 들어 가볍게 검색해봤는데 이곳에 들어감 이분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
http://www.byillust.com/artistGallery/43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