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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
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할머니는 그가 더 많다고 했어."
"응?"
"그런 사람들. 세상에는."
"아."
"사실이야?"
"그래. 하지만 복잡한 게, 세상에는 중간쯤 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단다."
"어디쯤?"
"선과 악 사이 어딘가에. 양쪽을 조금씩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 <P.547>
어젯밤 벽장에 자러 들어가기 전에는 네 살이었는데 오늘 어둠속에서 눈을 떠보니 다섯살이 됐다는 잭.
19살이던 어느날, 대학 도서관을 가려고 주차장을 걸어가며 음악을 듣다 한 남자에게 납치당해 '방'에 감금된 엄마는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우며 잭이 5살이 될 때까지 7년간 갇혀 지내게 된다. 감금 상태에서 태어나 방 한 칸과 엄마, 방 안의 물건들만이 전부인 것을 현실로 알고 자라는 다섯 살 소년 잭.
그 안에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놀이도 하면서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던 모자(母子)의 평온한(?)삶.
하지만 그것도 잠시, 6개월전에 해고당했다는 올드 닉의 얘길 듣고서 앞으로의 생활에 닥칠 어려움을 이해한 엄마는 잭과 함께 탈출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잭에게 진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급작스러운 상황에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아들 '잭'은 그냥 여기 있으면 안되냐 묻는데 . . . 엄마는 잭과 함께 무사히 그 '방'을 탈출할 수 있을까 ? '진짜' 세상은 이들 모자에게 행복한 날들을 선물해줄 수 있을까 ?
엠마 도노휴의 룸(ROOM)은 2008년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한, 아버지가 딸을 감금하고 성폭행해 아이까지 낳게 한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사실 이런류의 이야기는 기리노 나쓰오의 잔학기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데 잔학기는 2000년 가을 일본에서 일어난 '니가타 소녀 감금 사건'을 모티브로 정신병력이 있던 30대 남성이 10세 여자 어린이를 유괴, 19세가 될 때까지 무려 9년간 감금했던 충격적인 사건이다.
아무도 결혼하지 않고 우리 가족이기만 했을때 읽었던 잔한기와 두명의 올케와 한명의 제부, 두명의 조카가 생긴 지금 읽게 된 '룸'은 닮은듯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다 읽고난 느낌은 천지차이다.
잔학기를 읽었을땐 세상에 이런일이 있을수도 있겠구나 싶으면서 여자로서 산다는 것이 참 힘들구나. 밤늦게 다니지 말고 몸조심해야겠다 정도였다면 가족내 또다른 가족이 생긴 요즘 읽게 된 룸은 읽는내내 귀여운 조카들 얼굴이 떠오르면서 이런 일이 우리 식구에게 생긴다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겠다 싶으면서 충격이 몇배 심했다는 ~
'방'에서만 탈출한다면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과정이 만만치않다.
잭을 보면 그 짐승밖에 생각나지 않아 소름이 끼친다는 아버지. 나에게는 세상 모든 것과도 같은 존재라 말하는 엄마.
나 역시 잭의 유전적, 생물학적 아버지인 그의 존재때문에 잭의 존재가 두렵거나 괴로웠던 적은 없었는지 궁금했기에 그녀의 대답을 숨죽여 기다릴 수 밖에 없었는데 잭을 보면 오로지 잭만 떠올린다는 그녀. 그녀의 대답은 작은 감동이다. 누구의 '딸'이 아닌 한 아이의 '엄마'이기에 가능한 대답이 아니었나싶다.
아버지와 딸, 그 두사람의 심정을 모두 다 헤아릴수 있기에 가장 슬펐던 장면.
그리고 또 하나는 잭의 대학 학비를 위해 인터뷰를 하게 된 엄마가 받는 질문들(아들을 죽이고 싶었던 적은 없었냐, 책이나 전문가, 심지어 친척하나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기 힘들었을텐데 병원 같은 데 데려가 입양 보낼 생각은 없었냐 등등)날카로운 것이 내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더라.
언제나 탈출을 꿈꿨고, 때가 되어 방에서 탈출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엄마와 하루가 다르게 바깥세상을 배우고 조금씩 적응해가는 아들.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은 이렇듯 초라하게 한데 엉겨있는 것 같다.
모든걸 없었던 일로 만들수는 없지만 두번 다시 나쁜 생각 하지 말고 '잭'과 함께 희망찬 미래를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한 번도 못 만났다고 해서 진짜가 아닌 건 아니야. 이 세상에는 네가 꿈조차 못 꿀 것들이 더 많이 있단다." <p.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