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녁놀 천사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한없이 상상이 태어나고 자라고 묻혀가는, 지독히 난잡하게 보이나 묘하게 청정한 기운이 가득한 이야기의 나무바다다. <p.278>
저녁놀천사
정월. 부쩍 기력이 떨어진 홀아비 아버지와 쉰살의 홀아비 아들. 재작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 불현듯 찾아와 해가 바뀌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준코에 대해 얘기하며
그녀가 없는 지금 달라도 너무 다른 분위기에 젖어 한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경찰로부터 작년 11월 30일에 발견된 신원불명자에 대해 물어보려 한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소지품에서 쇼와식당 성냥갑이 나왔다며 너무 늦게 발견되는 바람에 성냥갑이 너덜너덜 썩다시피해서 알아내기까지 꽤 시간이 흘렀다며 꺼내놓는 얘기들이 언뜻 '준코'의 인상착의인 듯 싶어 부랴부랴 확인차 길을 떠난 '이치로'는 그곳에서 자신과 사정이 비슷한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 . .
살다 보면 틀림없이 좋은 일도 있을 거라고 했던 그녀인데, 그 누구에게든 등을 돌리지만 않았으면 행복해질 수 있었을텐데 준코는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됐을까 . . .
차표
할아버지와 단 둘이서만 사는 '히로시'는 이층 셋방에 사는 야치요 아줌마에게는 할아버지와 둘이서만 사는 속사정을 얘기할 정도로 가깝다.
사업을 말아먹고 빚까지 진데다 딴 여자하고 도망친 아버지. 여자 혼자 어린 자식을 키우는 건 힘든 일이라며 할아버지가 돌봐주기로 했지만 그 사이 엄마에게도 남자가 생겨 새로 가정을 꾸리게 됐다.
아비도 어미도 죽은 셈 치고 둘이 살기로 맘 정했다며 이래저래 불만이 있겠지만 어른이 된 담에 터뜨리라 말하는 할아버지.
그 얘길 듣고 아직 어린애한테 그런 얘기까지 했다며 화를 내는 야치요 아줌마지만 모르는 것보단 확실하게 아는 게 좋다는 제법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히로시'.
그런 히로시가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는 달콤 쌉싸레한 맛이 난다.
특별한 하루
도쿄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지은 건물. 37년 몸담은 곳과의 이별.
전임 사장이 퇴임하면서 가장 젊은 임원이던 친구 '다카쓰키'가 사장으로 취임되면서 출세한번 못하고 그럭저럭 정년퇴직을 맞게 된 다카하시는 오늘을 특별한 날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퇴근후 역 앞 로터리 단골가게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곤 가족이 있는 집으로 향한다.
정년퇴직하는 중년 남자의 하루에 대해 얘기한 줄 알았는데 이런 반전이 있을줄이야 ;;;
호박(琥珀)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 말고는 더 돈을 벌 생각이 없는 '호박'이란 커피전문점을 운영하는 아라이.
정년퇴직 직전에 휴가를 다 써야 해서 혼자 여행중인 형사 요네다 가쓰미는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항구 도시인 이곳을 찾았다 아무것도 없는 모습에 낭패.
그 찰나에 딸로부터 헤어진 아내가 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별거와 이혼. 헤어지고 1년도 안 된 사이에 딸이 남의 사람이 되고 그로부터 2년 뒤 전처가 재혼을 한단 사실에 새삼 혼자가 됐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요네다는 골목길을 헤매다 커피라도 한잔 마시려고 호박을 찾았다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 . .
언덕 위의 하얀 집
사철 피어나는 장미 울타리가 있어 항상 꽃바구니에 담긴 서양식 장난감 집처럼 보였던 언덕 위의 하얀 집.
그 특별한 공간 속 특별했던 소녀와 그 소녀를 사랑했던 한 남자와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친구 기요타에 얽힌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 읽고 나니 <근데 왜 나야?>라는 기요타의 물음과, <어른이란 게 그런 거야. 얼굴 표정과 속내가 다른 법이라고. 자네도 머지않아 다 이해할 거야>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내내 메아리쳐 살짝 괴로웠던 기억이 ~
나무바다의 사람
존경하던 작가의 자살 소식에 충격을 받고 군에 입대한 나는 스무살 무렵 신기한 체험을 했던 얘길 들려준다.
체험이라 단언할 만큼 확실한 기억도 아니고 오랜 세월 동안 내 맘음대로 상상이 더해져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데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는 일은 무엇일까?
인생의 저녁놀 풍경이 진하게 배어나는 아사다 지로 문학의 절정이라는 <저녁놀 천사>는 저녁놀천사, 차표, 특별한 하루, 호박, 언덕 위의 하얀 집, 나무바다의 사람등 여섯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쓸쓸하면서도 아련한 느낌이 비슷하달까 ~ 들쑥날쑥 하지 않고 고른 글솜씨로 만족감을 더한다.
제목이 주는 묘한 여윤이 강하게 남아서인지 이 책을 사람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혈기왕성한 청년보다는
세려된 매너와 지성, 너그러운 배려와 중후안 외모를 갖춘 중년 남성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글 속에 녹아든 소탈하고 담백하면서도 다정다감한 면모를 만끽해보시길 ~
욕심을 앞세우지않고 차분히 써내려간 이야기속에 인생의 빛과 어둠이 그대로 녹아들었다고 해야하나 ~
그래서 좋으면서도 단편단편 조금은 특별한 이야기를 기대한 독자에게는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도 온전히 독자의 몫.
김동영의 나만 위로할 것을 읽다보면 지금도 먼 훗날에도 서로에게 힘이 되는건 지나간 시간들일 것이라며 나이가 들면서 현실을 지탱하는 저울보다 기억을 지탱하는 저울이 말을 더 잘듣게 돼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 또한 기억이 많을수록 잘 살게 돼 있다는 말을 믿고 싶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흔한 사람들이지만 특별한 기억 하나만으로도 오늘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시간속 사람이고 싶은것 처럼
나 역시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