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름의 마지막 장미
온다 리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10월
평점 :
"진실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허구가 섞이면 더욱 진한 향을 풍긴다'
진실은 거짓에 섞어야 한다. 그래야 더욱 진실다워 보인다.
또 진실은 농담에 섞어야 한다. 그래야 얘기가 더욱 탄탄해진다. <p.244>
국립공원의 산 정상에 있는 고풍스럽고 호화로운 호텔. 매년 늦가을 이곳에서는 재벌가 사와타리 그룹의 세 자매가 주최하는 파티가 열린다.
그녀들의 차 모임에 초대되는 것을 명예로운 일로 여기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귀찮게 여기는 사람도 있는데 모두가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해마다 때가 되면 이곳을 찾는 까닭은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며 즐기기 위해서다. 자신이 선택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테니.
수십 명의 손님을 초대해놓고 세 자매가 자신들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어떤 사건들에 관해 들려주는 기묘한 만찬.
세 자매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이야기는 듣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녀들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이 게임에 나도 참가하고픈 욕심이 생긴다.
어떤것이 거짓이고 사실인지 분간이 안가는 그 이야기들만으로도 행복한데 알랭 로브그리예가 쓴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ㅣ불멸의연인>이 묘하게 섞이면서 분위기는 한층 더 신비스럽게 변한다. 이 소설이 없었다면 굉장히 심심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극의 분위기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다.
제1변주에서 제5변주까지 이야기의 화자가 변화면서 그들이 각기 들려주는 이야기에 푸욱 빠져들 수 밖에 없는데 사쿠라코의 남동생 도키미쓰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배우 미즈호의 매니저인 다도코로 사키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사쿠라코의 남편 류스케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아마치 교수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이야기, 사쿠라코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등 어느것하나 빼먹을 수 없는 이야기들 투성이다.
제6변주에서는 1년의 시간이 흘러 늘 과도한 의무감과 다소의 긴장감을 느끼면서 참석한 파티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미즈호의 초대로 여섯명이(사쿠라코, 다쓰요시, 도키미쓰, 아마치교수, 다도코로 사키, 류스케) 다시 그 저택에 모이게 되면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많은 말들이 함축적으로 담긴 가장 중요한 파트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에 있었던 일과 지난해에 없었던 일. 자신들의 생활과 인생을 거짓말로 엮어온 여자들. 정말 죄 많은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작년에, 이곳에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걸까요.
나는 작년에도, 올해도, 그 영화를 봤습니다. 아까 다쓰요시 씨가, 기억을 날조한 데자뷰를 다룬 이야기라고 말한 그 영화를.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현실 아닐까요.
우리 모두가 기억을 날조하고, 자신에게 생겼던 일, 과거에 있었을 일을 날마다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있었을지도 모르는 밀회, 만났을지도 모르는 연인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지난해 이곳에 와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 일어날 일, 혹은 나 자신이 저지를 뻔한 일을. 어쩌면 그 일들은 현실에서 이미 일어났는지도 모르죠.
1년이 지난 지금, 우리 모두가 그걸 회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믿게 될 것만 같아요.
여러분은 현실을, 기억을, 그런 식으로 느껴본 적 없나요?" <p.372>
2010년 1월에 읽은 도미노 이후 간만에 만나게 된 여름의 마지막 장미.
너무도 온다 리쿠스러운 이야기가 가득 담긴 소설이라 그런지 재밌게 잘 읽었다. 앞으로도 쭈욱 나는 온다리쿠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을 듯 ~
거짓에 섞기도 하고 농담에 섞기도 하면서 들려주는 진실. 그 진실의 끝은 언제나 허무하기만 하다.
어둡고 은밀하기에 즐겁고 아름다워보였던 것들이 환한 불빛아래 빛을 잃어가면서 퇴색해가는 모습을 본 듯한 기분이랄까.
이 책 제목 '여름의 마지막 장미'는 19세기의 바이올리니스트 하인리히 빌헬름 에른스트가 작곡한 동명의 연주곡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이 곡은 하나의 테마가 다양하게 변주되는 음악으로, 이 소설도 하나의 스토리가 서로 다른 화자에 의해 제1변주에서 제6변주까지 이어진다.
나처럼 좀전에 죽었던 사람이 아무일도 없었던 듯 살아움직이면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깜짝 놀랄일이 없기를 ㅎㅎ
당신의 생각을 함부로 믿지 마라.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 세상에 편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제대로 하자고 들면 <p.53>
* 인생이란 흔히 그런 것이리라. 자신에게 없는 것을 손꼽으며 남을 부러워한다. <p.64>
* 뭔가를 바란다는 거, 참 신기한 일이지. 이미지에 불과한 것을 의지의 힘으로 실현하려고 하는 거잖아.
이미지는 중요한 거야. 매일 염원하다보면 실현되기도 하니까 말이지 <p.193~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