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시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지나가지 않는 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p.242]
채굴장은 터널을 파나갈 때 제일 끝에 있는 지점을 채굴장이라고 한단다. 터널이 뚫리면 채굴장은 없어지지만, 계속 파는 동안은 언제나 그 끝이 채굴장이라고.
2008년 나오키상 수상작 이노우에 아레노의 '채굴장으로'
띠지에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의 그 가슴 저림을 잊지 못하는 당신의 이야기라 쓰여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모든 책의 띠지를 보면 이런 멘트는 누가 생각해내는걸까~ 순간 아무것도 아닌 이것이 너무나 궁금해진다. 에쿠니가오리씨와 절친이라는 얘길 들어서일까? 잔잔한 스타일이 비슷하구나 싶었다가 어느순간 이 모든것이 일본스타일이구나 싶은 그런 이야기다.
목차가 참 간단하다. 3월부터 그 다음해 4월까지의 이야기가 너무나 잔잔하게 진행되는데 그 내용만은 결코 잔잔하지 않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무슨책을 읽고있지? 줄거리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상적이고 나른하기만하다.
지도 남쪽에 있는 외딴섬. 일찍이 탄광업이 번영을 이루었다가 쇠퇴한 이 섬. 주인공 세이는 초등학교 양호교사다.
누구랄것도 없이 모두와 사이좋고 이웃 할머니 시즈카씨에게는 치즈케익, 전갱이 구이, 떡국 등등을 끓여주고 말벗도 되어주는 다정한 사람. 그런 그녀가 도쿄에서 온 새로운 선생님 '이사와'를 좋아하게된다. 남편이 있으면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유부녀가 주인공인 연애 소설이라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기대에 못미칠만큼 시시하기만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일탈은 어디에도 없다는. 어느 정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통속적인 사건이 있을 법한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랬다면 아내의 유혹이 되버렸겠지. 그보다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다른 남자에게 자꾸 시선이 가고 마음이 끌리는 것을 한없이 억제하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소설의 주를 이룬다. 그것이 넘 심심할까봐 감초역할을 해주시는 분들이 굉장히 독특하다. 소극적인 주인공과는 대조적으로 유부남과 연애하는 걸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니는 동료 교사 쓰키에도 있고, 아흔이 넘은 나이에 음몽(淫夢)을 꾸며 신음하는 시즈카 할머니도 있으니 ~
그녀들의 이야기가 선정적이라기보다는 애틋하고 어딘지 마음을 울리는 구석이 있는건 [이노우에 아레노] 그녀의 문체탓인 듯 ~
강렬하고 자극적인 것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조미료가 안 들어간 음식처럼 밍밍하고 싱겁게 느껴지는 이야기.
이렇게 또 스르르 기억에서 사라질 것만 같은 이야기들.
3학년 위의 키가 크고 조용한 소년. 어릴 때는, 세 살 위면 모두 나보다도 어른들 쪽에 가깝게 느껴졌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어른스럽고 멀리 느껴지던 소년. 우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일이 많았던 그의 인상은 속눈썹이 길고 눈썹이 짙은탓에 그림책에서 본마리아 님을 떠올리게 했다.[p.108] 이렇게 시작하는 그녀가 남편과 결혼하게 된 스토리가 더 로맨틱하게 느껴지더라.
남편과 산지 어느덧 4년이 지나서 남편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의 버릇, 몸짓이 나타내는 의미, 그를 기쁘게 하는 것과 우울하게 하는 것 등등. 물론 모르는 것도 있다. 예를들어 우리가 만나기 전, 도쿄에서 지낸 그의 생활에 대해 전부 다 들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내가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을 더욱 돋보이게 할 뿐이다. 라고 말하는 그녀의 자신감까지도 !!!
그리고 섬마을이기에 가능한 단체생활들. 누구랄것도 없이 모두 함께 모여 즐기는 입학,졸업식, 벚꽃놀이, 수영장개장 행사등등
이 모든 모습들이 어찌나 우리네들 일상과 비슷한지 ~ 이런 일상을 글로 만나면 그 느낌이 너무나 새롭게 다가온다.
해마다 지켜봐왔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것처럼 ~
이노우에 아레노의 소설을 읽으면 이노우에 아레노 병에 걸린다는 에쿠니 가오리씨가 말하는 그 이노우에 아레노의 병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물'이라는 그녀의 또다른 소설을 읽어보고싶다. 그것을 읽고 난 후 나는 이노우에 아레노 병에 걸겨 있으려나?
바보같이 춤을 추기도 하고 마구 달리기도 하다보면 어딘가에 도착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혹은 핫! 하고 소리친 순간에 트럼프가 뒤집히는 것처럼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에 자신이 서 있지 않을까.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런 것 없습니까? [p.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