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적 고려사 - 몽골 세계제국에도 당당히 맞선 고려의 오백 년 역사
이윤섭 지음 / 필맥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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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 고려사
이윤섭 / 필맥 / 622

 

이른바 대중독자를 위한 한국사, 그중에서도  단대사의 경우에는 전공자에 의한 저술보다 비전공자에 의한 저술이 압도적으로 많다. 특히 고려사는 고대사와 조선사 사이에 끼어 크게 인기가 없던 시대로 알고있는데 이 분야도 마찬가지로 비전공 아마추어 역사가의 저작이 많다.  그래도 지금은 박종기 박용운 등 대가들의 저서가 있지만 그 인기는 모르겠다.  고려사에 대한 저작을 찾다가 이윤섭의 고려사를 접하게 되었다.  별 생각없이 읽어내려갔는데 이 책이 꽤 마음에 들었다.

 

보통 한국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만 논하는데 이 책은 특이하게 중원과 북방의 정세를 매우 상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마도 고려사는 독자적으로 전개되었다기 보다는 중국, 발해, 거란(요), 여진(금) 등과의 교류와 갈등을 통해 500년의 역사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국제관계 속에서 고려사를 파악하는 관점이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여타 역사서는 고려의 입장에서 타국과의 관계를  서술한 점이 차이라 하겠다. 이점이 이 책의 장점이자 특징이다.

 

고려는 천하중심국이라는 세계관과 자신감을 가지고 군주의 호칭을 천자나 황제라고 불렀다. 태조때 군주의 정령은 황제의 용어인 조詔, 제制라 하고 복식도 천자의 색인 자황색으로 했고 고려사 악지에는 “해동천자이신 지금의 황제께서는...”이란 노래가사도 나온다. 여진의 금또한 고려를 황제로 인식했다. 그러나 송과 요에 대해서는 왕을 칭했다. 이들도 고려가 내부적으로 황제를 칭함을 알면서도 간섭하지 않고 인정했다.  그러나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중화주의가 득세하고 특히 뒤를 이은 조선조에서 고려사를 편찬할 때 칭제가 사대의 예에 어긋난다하여 많은 수정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고려시대 여성의 지위는 현재와 비슷한 듯. 재산은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균등하게 상속되었고 차서도 나이순을 따라 남녀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제사는 자녀가 돌아가며 주관하였다. 아이들은 외가살이가 일반적이고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왔으며 이로인해 차별받지 않았다. 재혼후 왕비가 된 경우까지 있다.

 

중국에 대한 서술중 후주의 절도사 조광윤이 거란을 치려고 군사를 일으켜 나갔다가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하루만에 말머리를 돌려 후주를 무너뜨리고 송나라를 건국한 내용이 있다. 마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모양이 비슷해보인다. 그런데 이때 쿠데타에 동의한 조광윤이 세가지 조건을 내건다. 후주의 왕족을 해치지 말 것, 관료들을 모욕하지 말 것, 정시靖市하지 말 것. 정시란 수도를 약탈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오대십국의 혼란기에 반란이 일어나면 그 도읍을 삼일동안 약탈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로서 군인들은 오히려 약탈을 원했다고 한다.

 

백암 박은식은 여진족의 金나라가 한국사에 속한다고 했다. <몽배금태조>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는 여진족이 한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여진은 조상이 신라에서 왔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때문에 저자는, 중국은 자국 영토에 있다는 이유로 관계없는 역사도 중국사에 포함시키고 고구려 발해도 자기역사에 넣는데 우리도 여진의 역사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충분히 맞는 말이다.  여진, 말갈은 고구려때부터 우리와 역사를 함께 했고 고려도 전쟁시에 여진의 군사를 데리고 싸웠다. 부여에는 여진의 유적이 함께 있다고 한다.

 

책에는 매우 중요한, 강역관계 서술도 나오는데 저자가 이를 꼭 꼬집어 주장하지는 않는다. 소개만 하고 있다. 고려의 경계는 어디인가? 천리장성의 위치는 어디인가? 윤관의 9성은 어디인가? 사실 세가지가 모두 하나로 통한다. 고려의 경계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사료를 인용하여 고려의 동북경계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지금의 북간도 지역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책의 목적이 강역고증이 아닌 고려사의 전개이므로 저자는 다만 문제제기 정도에 그치고 있다고 보인다. 송의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보이는 고려의 국경은 참 이상하다.  학자들이 이 문제를 심도있게 연구했으면 좋겠다. 무조건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허황된 뻥튀기로 몰지말고 공론화해서 연구해보면 좋겠는데...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문제제기를 하는게 가장 합리적이다.

 

삼별초의 난과 대몽항쟁에 대한 시각도 전환을 요한다. 저자는 삼별초의 군사행동이 항쟁이 아닌 반란임을 분명히 한다. 당시 고려왕실과 무인정권의 무대책을 비판하고 원의 요구에 응해 화친하는 것이 국가와 백성의 보전에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무인정권의 사리사욕으로 백성들이 오랜 시간 고통을 받고 무인정권의 기반인 삼별초가 끝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문제는 당시 원나라의 상황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를 필요로 하는데 이 책은 충분히  몽골의 동향을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몽골이 고려에 대해 가지는 친근한 또는 경계하는 감정은 좀더 깊은 연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서정록이 쓴 <마음을 잡는자...>에 보면 칭기즈칸의 두 번째 부인은 고려인이라고 한다. 게다가 몽골과 고구려는 건국신화도 너무 비슷하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고려를 어머니의 나라라고 부른다고 한다. 혹은 우리민족의 출자가 바이칼호 인근이니 몽골의 한 조상인 바이칼 코리족이 우리나라의 조상일수도 있다고 서정록은 주장한다. 어쨌든 몽골 원은 고려의 끈질긴 항쟁을 높이 평가했고 중원인은 무시했지만 고려 자체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 고려의 풍습이 유행했고 고려의 여자를 아내로 맞기를 원했다.

 

공민왕의 피살은 조선 사가의 기록만 보지말고 당시 강국으로 부상하는 명과 북원 사이에서 외교방향을 잡지못한데서 오는 관료측의 불만이 큰 원인이었을 것으로 본다. 주원장의 최초 사절은 고려와 사대관계가 아닌 우호관계 수립이 목적이었는데 오히려 처음부터 명에 저자세로 사대를 택한 공민왕에 대한 실망으로 북원과 연합하여 시해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같은 논리로 충자 돌림왕들에 대한 평가도 다르다. 충선왕은 호평이다. 대부분의 고려사 저작에서 패륜무도로 묘사하는 충혜왕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조선조 사가들의 기록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이 저자의 참고문헌이 상당히 방대한 것으로 보아 역사공부의 온축이 상당함을 짐작케 하는데 사료에 대한 이해도는 대단하다. 지난번에 본 남경태의 사이비성 무자격 역사서술과 너무 비교된다.

 

이성계의 가계에 상당부분을 할애했다. 이성계는 무신정변 실력자 이의방의 아우 이린의 자손이라고 한다. 이성계를 야심을 가진 인물이자 처세의 달인으로 보고 이성계가 개혁세력이 될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반면에 최영은 매우 우호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편 발전사관과 유물사관을 강력히 비판하는데 특별한 근거는 없다.

명의 철령위 설치에서 다시 철령의 위치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온다. 이미 백여년 전에도 철령의 위치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다. 일인학자 지내굉은 압록강 연안의 황성皇城을 철령으로 보았고 같은 일인 화전청은 현재의 철령인 강원북부를 철령으로 보았다.  저자는 위치를 확정짓지 않았지만 역사적 맥락으로 볼때 철령은 압록강 이북지역이 타당하다. 주원장의 명은 철령의 이동 이북 이서가 모두 요동도위에 속한다는 것. 강원도의 철령이면 이동 이서가 말이 안된다. 현재의 지명으로 보아도 지금 심양의 위쪽에 철령이란 곳이 있다. 차라리 이곳이 훨씬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또한 우왕대의 요동정벌 미수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사실 참 한심하다. 조선이 스스로 명의 속국으로 전락한 매국적 사건이다. 이를 이성계의 야욕탓으로 해석한다.

 

전반적으로는 아주 만족스럽지만 군데군데 서술이 일관성을 조금 잃고 있다. 즉 매끄럽지 못하고 고어체를 쓰는 부분이 있다. 이런 부분은 저자의 서술로 바꾸지 못하고 옛 사료를 그대로 인용하듯 썼기 때문이다. 인용도 아니고 서술도 아닌 뒤죽박죽이 여러번 나온다. 게다가 경제관계, 사회문화 관련 서술은 없다시피 한다. 비단 이 책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큰 단점이 아닐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색깔을 입힌 점이나 주변 나라와의 관계 서술, 흐름을 위주로한 서술 등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싶다. 재미있게 읽었다. 고려사를 제대로 알고싶은 사람은 첫 사서로 이 책을 선택하면 도움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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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물리학 - EBS 다큐프라임
EBS 다큐프라임 [빛의 물리학] 제작팀 지음, 홍성욱 감수, EBS MEDIA 기획 / 해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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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의 물리학
EBS다큐프라임<빛의물리학>제작팀
325

 

이제까지 양자론과 관련된 몇권의 책을 읽어보았으나 여전히 양자론은 마치

구름속을 헤메는 듯 무엇을 말하는지 알수 없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양자론을 이해한다면 양자론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언급이

참으로 그럴 듯 하다. 그러니 고등학교때 물리시간을 싫어했던 내가 양자론의

얼개라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불성설임이 확실하다. 나처럼 양자론을

알고싶지만 너무 어려워서 엄두를 못내는 사람들을 위해 EBS에서 ‘빛’을 매개로

해 양자론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책은 그렇게 해서 방송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책은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있다. 1. 빛과 시간,특수상대성이론  2. 빛과 공간, 일반상대성이론,  3. 빛의 추적자  4. 빛과 원자  5. 빛과 양자  6. 빛과 끈


방송된 내용을 책으로 옮긴 것이라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사진자료가 많이

사용되었다. 빛으로 양자론을 설명하려는 구상은 아인슈타인이 빛의 속성을 밝혀 상대성이론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책은 시작된다.

 

빛이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사실, 빛은 초속 30만km의 등속을 갖는다는 사실,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질량을 가진 물체는 중력을

가지며 중력이 곤간을 휘게 만든다는 사실, 빛은 전자기파의 일종이라는 사실

등으로부터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입자인 원자와 원자핵, 전자의 발견, 소립자의

발견과 우주구성의 최소단위는 끈이라는 최근의 물리학 연구성과 까지를

다루었다. 

 

아쉬움이 없지 않다. 아인슈타인을 출발점으로 잡은 이유는 그가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의 접점에 있던 인물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다보니 이 책이 양자론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지 현대물리학의 발전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지

애매해진 느낌이다. 2001년 김영사에서 발간된 하룻밤의 지식여행 시리즈에

매키보이가 쓴 <양자론>이 있다.  <양자론>은 양자론에 대한 내용만을 담았다. 매우 간략하게 그러나 어려운 설명으로.  반면 <빛의 물리학>은 내용도 쉽고

서술도 쉽다. 그러다보니 정작 양자론이 무엇인지는 더욱 알수 없게 되었다.

차라리 현대물리학입문으로 제목을 바꾸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생각된다.

 

양자론을 위해서라면 전자도약이나 불확정성의 원리를 좀더 세밀하게 설명했어야 하고 양자론의 큰 특징중 하나인 양자얽힘 현상을 반드시 언급했어야 한다.

시세계와 미시세계를 따로 나눌것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기본구조인

원자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통해 ‘신神’의 영역으로 접근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는 마지막에 11차원과 다중우주를 언급하고 있다. 다중우주설은 존재를 부정하는 학자도 있는데 <과학들이 알고 싶어하는 신의 생각>이 그러하다.

그런데 서술의 목적이나 방향으로 보면 이책은 오히려 수학을 다룬 <신의 생각>

보다도 더 소략하다는 느낌이다.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 더 이해가 어려워진 양자론이다. 다만 우주는 진동하고

있고 우리의 의지는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기왕의 학설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으로 만족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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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문화재 - 이를 지켜낸 인물이야기
문화재청 엮음 / 눌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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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이야기
문화재청 / 눌와 / 243


문화재는 그 나라의 유무형 문화유산이자 정신이고 역사다.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나라이니만큼 많은 문화재가 있었지만 몇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많은 수가 파괴되었고 결정적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문화재가 망실되었다.

 

현재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해외에 있는 우리문화재의 수는 약 15만점이 넘는데 이중에는 불법 약탈된 문화재는 물론 합법적으로 취득한 문화재도 포함된다. 약탈문화재는 될 수 있는한 돌려받아야 하지만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소재를 파악할수 없는 문화재나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르는 문화재까지 합하면 얼마나 많은 양의 문화재가 해외에 유출되었는지 알수 없는 일이다. 역사의 비극이고 국력이 약한 탓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있는 문화재 중에서도 자칫 유실될 뻔한 것을 목숨까지 걸고 지켜낸 존재와 인물에 관한 것이다. 모두 열세편의 문화유물이야기가 담겨있다.

임진왜란시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선비들,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회수한 경천사십층탑, 간송 전형필의 문화재 수집, 만신창이가 된 광화문, 안용복이 지킨 독도, 프랑스에 있는 직지심체요절, 일본땅에서 끝내 화재로 소실된 경복궁 자선당, 독일에서 돌아온 겸재화첩, 야스쿠니의 북관대첩비, 남아있는 덕수궁, 625전쟁때 지켜진 고찰들, 도둑맞은 건봉사 진신사리, 건설현장에서 살아남은 노거수들 등에 관한 이야기다. 이 유물들은 각각 존재와 가치를 알아내고 온 힘을 다해 이를 지켜낸 사람들 때문에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남아있게 되었다.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쉬지 않은 일이다.

 

경천사십층석탑은 지금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현관에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원래 유물이란 제자리에 있어야 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경천사는 개성에 있던 절이었으니 차라리 홀로 박물관에 보존된 것이 다행이지도 모른다. 1348년에 세워져서 후일 원각사 십층탑의 모델이 된 탑이다. 국사교과서에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탑이라고 설명이 되었듯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대리석십층탑이고 층마다 기와지붕의 모양으로 조각되어있다. 이탑은 1907년 우리나라에 온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가 그 자태를 탐내 무단으로 주민들을 협박하여 탑을 해체 일본으로 실어갔다. 이를 안 영국인 베델이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이에 호응하여 일본의 영자신문에 비판기사를 실어 약탈행위를 고발했다. 사실이 외국에도 알려지고 일본내에 이를 비난하는 여론이 일자 마침내 1918년 다나카는 탑을 한국에 반환하게 된다. 석탑은 많은 부분 훼손되어 경복궁앞뜰에 방치되었다가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고 1995년 본격적인 해체복원작업을 거쳐 현재 국립박물관에 전시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경복궁에는 동궁의 침전인 자선당이 있다. 1430년 건립되어 임진란대도 살아남았던 몇 안되는 전각이다. 1915년 데라우치총독이 총독부건물을 짓기 위해 경복궁을 마구 훼손하던 당시에 많은 수의 전각이 일본과 민간에 팔려나갔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새로 지을 때 330여동의 전각이 있었는데 일제시기에 200여동이 헐리고 팔려나갓다. 자선당은 오쿠라 기하치로(일제기 일본의 거상으로 선린상고의 설립자고 동경에 오쿠라슈코칸이라는 사설 박물관을 건립했다. 우리나라에서 악명높은 문화재 약탈범 오쿠라는 두명인데 오쿠라재벌 오쿠라호텔설립자 격인 오쿠라 기하치로는 성이 大倉이라 오오쿠라 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명의 오쿠라는 오쿠라 다케노스케인데 성이 小倉으로 우리 약탈문화재로 가득한 오쿠라컬렉션의 주인이며 오오쿠라와 구별하여 오구라라고 부르기도한다. 둘다 악질이다.) 에게 팔려 동경의 자기집 안에 재조립되어 사설 박물관 조선관으로 사용되었다. 미국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자선당의 온돌방식에 감탄하고 이후 그가 설계한 집에 온돌난방방식을 적용했다는 여담도 실려있다. 이 자선당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불타버리고 잔해만 남게 되었다.

 

목원대 교수 김정동은 일본에서 공부하던중 오쿠라가 자선당을 뜯어갔다는 내용을 접하고 그 흔적을 쫒았다. 오쿠라호텔을 찾아가 정원 한구석에서 기단과 주추만 남은 건물터를 발견하고 이를 국내 학계에 공개하였다.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큰 관심을 받아 1996년 유구만 남은 자선당을 한국으로 옮기게 되었다. 110톤의 유구는 경복궁으로 돌아와 지금 건청궁옆에 보존되어 있다. 비극이자 코미디다.

 

임진왜란시 정문부장군의 공적을 기록한 북관대첩비는 함경도 길주에 있던 것을 러일전쟁당시 일본군 2사단이 치욕스럽다며 뽑아서 일본으로 가져갔고 연유를 알수없이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 정도가 아니라 흉물스럽게 방치되었는데 1909년 조소앙이 처음 비석의 존재를 알렸고 1978년 재일학자 최서면이 이를 공개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해주정씨 문중과 외무부를 비롯 다양한 경로로 비의 반환촉구운동이 전재되었고 남한과 북한가 일본의 불교계가 협동하여 2005년 국내로 반환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 비는 국립박물관에서 복원과 보존처리를 하고 2006년 3월 북한으로 인도되어 현재 김책시 임명리에 설치되어있다.

 

이외에도 기가 막히거나 마음을 아리게 하는 유물과 고마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지금 유출 문화재 환수를 위한 민간단체로는 혜문스님의 문화재제자리찾기 가 유명하고 정부에서도 국외소재 문화재재단을 설립하여 여러 방면으로 유물문화재의 회수에 힘쓰고 있다. 관심과 적극적 행동, 나아가 국력만이 우리것을 되찾는 길이다. 프랑스에서 돌려준다고 약속한 것조차 주지 않고 버티는 현실인데 과연 중국에도 그렇게 했을까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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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 다보탑의 돌사자는 어디로 갔을까?
혜문 지음 / 작은숲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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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혜문  작은숲  255

 

저자 혜문은 승려의 신분으로 지난 세월 우리나라에서 불법적으로 반출되었던

문화재를 되찾아 오기위한 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스님은 5년간 빼앗긴 문화재

반환운동을 전개해왔다고 한다. 이 책이 씌여진 것이 2012년이니 지금은 7년째

반환운동을 계속해왔다는 뜻이다. 혜문스님은 환수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해 <문화재 제자리 찾기>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그동안의 환수결과와 혜문스님이 생각하는 불법유출 문화재란 무엇인지에 대한 기록이자 소회다. 책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있고 19개의 문화재 관련

이야기가 담겨있다. 혜문스님은 명성황후(민비)의 죽음을 파헤친 책 <조선을

죽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익히 알고있는 이야기도 있고 전혀 몰랐던 사실도

들어있다. 이런 것을 파헤치는 수고와 노력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첫 번째 파트에는 명성황후를 죽인칼 히젠도가 후쿠오카시사에 보관된 이야기,

안중근의사의 총알이 전시된 일본국회 헌정기념관, 조선 기생 명월이의 생식기

표본이 버젓이 전시되었던 이야기가 ‘잃어버린 기억’이라는 부제하에 있다.

두 번째 파트는 ‘되찾은 문화재의 허와 실’이라는 부제로 도려받은 문화재의

부실한 관리에 대한 이야기다. 세 번째 파트는 잃어버린 문화재중 소재가 파악된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칼중 하나인 히젠도는 후쿠오카시 구시다신사의 경내에 

보관되어있다. 연전에 후쿠오카에 갔을 때 들러보고자 했으나 가보지 못한

기억이 있다. 인터넷에 올라있는 후쿠오카 여행기를 보면 히젠도의 존재여부를

아는 글들이 반정도 밖에 안되는 듯 하다.


도쿄대학에는 일제강점기에 약탈당한 조선왕조실록 일부가 남아있었는데

2006년 5월 도쿄대는 서울대학교에, 자신들이 보관중인 오대산본 실록 47책을

기증한다고 발표하여 우리나라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실록의

환수를 요청하고 일을 성사시킨 것은 혜문스님과 조력자였으나 도쿄대가 갑자기 기증의사를 밝힘으로써 서울대가 마치 자신들이 한일처럼 발표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돌아왔으니 된거 아니냐는 물음에 대해 혜문스님은, 불교도들의 노력을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렇다해도 실록은 ‘환수’가 되어야지 선의의

‘기증’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2010년 일본정부에서  총독부시절부터 갖고있었던 조선왕실의궤를 비롯 규장각도서 1430점을 반환하겠다는 발표를 했는데 이 역시 혜문스님측의

환수운동 결과다. 그런데 그중에 이토 히로부미가 규장각에서 대출해간-약탈이

아니고- 규장각도서가 938권이나 포함되어있다. 100년동안 대출이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규장각에서는 이를 알고있었는데도 그동안 대출도서 회수를 위한 아무런 노력도 의사표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정부에서 스스로 돌려주기 전까지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는 점을 혜문스님은 허탈하게 지적하고 있다. 

 

1951년경 미국에서 반환받은 명성황후 표범가죽 카펫 역시 존재여부 자체를

모르고 있다가 문화재제자리찾기 회원들의 존재확인 감사청구가 있고 나서야

박물관 수장고에서 찾아낸 것이다.

 

그 외에 주로 일본과 미국에 많이 있는 불법반출 문화재중 알려진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행방을 알수 없는 다보탑 돌사자상, 도쿄박물관에 있는

금산사 향완, 오쿠라호텔의 우리 석조문화재, 경복궁의 자선당이 통째로 뜯겨가

오쿠라호텔 슈코칸 전시관으로 사용되었던 일, 도굴로 유명했던 오구라컬렉션과 그중 조선왕의 갑옷과 투구, 회암사출토품이 분명한 부처님 진신사리와 사리구가 보스톤미술관에 있는 사실, LA 라크마박물관에 있는 문정왕후 금보, 미군정기에 문관으로 문화재를 광범하게 밀반출한 헨더슨과 헨더슨컬렉션, 이순신장군이

실제로 사용했던 쌍룡검 등등의 슬픈 사실이 기재되어있다. 말미에는 최초

금속활자본인 직지가 불경은 아니므로 직지심경이 아닌 ‘직지심체요절’이라는

설명이 첨부되어 있다.

 

해외유출문화재는 상당히 복잡하고 섬세한 문제다.
정부기관이 민간이 하는 일에 협조는 못할망정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데 대한

섭섭함이 책에 한가득하다. 한편 이해가 가기도 한다. 외교채널로 접근할 문제가 있고 민간교류로 해결할 사안이 있다. 또 해외유출문화재라고 하지만 합법과

불법사이의 구별이 매우 어렵다. 박물관에서 자료를 갖춰 구매한 것은  불법

약탈물이라고만 볼수는 없다. 그리고 실제 불법 약탈의 결과라 할지라도 

해당국에서 반환에 협조하지 않으면 속수무책이다.  혼자힘으로 승려의 몸으로

유수의 문화재반환을 이끌어낸 혜문스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인다. 스님은,

문화재는 민족의 정신이고 우리의 기억과 삶이므로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있는 것도 관리못하는 무능을 탓하기도 한다. 그 역시 맞는 말이다. 수장고보관이 아니라 번듯하게 대로 한가운데 있던 국보 1호도 태워먹지 않았던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자료에 의하면 해외에 있는 우리문화재는 파악된 수만

15만점이 넘는다. 꼭꼭 숨겨 소재를 알수 없는 것까지 합하면 100만점이 넘을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다 찾아올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일단 소재파악이

가장 중요하고 근현대 유물은 불법반출임을 증명해서 환수에 힘을 써야한다.

구매도 한 방법이다. 민족감정이나 피해의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있는 문화재 관리도 중요하다.  혜문스님은 너무 중요하고 필요한 일을 계속하고 있지만 스스로 지적한 대로 대중주의나 민족주의에 매몰되어서는 곤란하다.

예를 들어 히젠도는 일본측에서 주면 좋겠지만 왜 거기다두냐고 다그치는 태도는 좀 아니다. 기념품처럼 보관한다고 했는데 혜문스님이 쓴 글 자체만 봐도 기념품

처럼은 아니다. 그저 골방에 ‘보관’하고 있는 중이다. 어쨌든 관건은 널리 알리는 일이다. 많이 알려질수록 우리에게 유리하다. 

 

그러나 우리땅에서 후손들에게 사랑받고있어야할 문화재들이 외지에서 숨어서

혹은 의미도 모르는 자들의 손에서 향수병에 고생하리라 생각하니 조상님들께

정말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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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 조선의 책과 지식은 조선사회와 어떻게 만나고 헤어졌을까?
강명관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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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강명관 / 천년의상상 / 547

 


예전에 무슨무슨 시험이나 퀴즈에 단골로 나오던 문제중에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는 무엇인가 하는게 있었다.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되는데  답은 우리나라에 없는 직지심체요절이나  책이 남아있지 않은 상정고금예문이다.  이걸가지고 서양의 구텐베르크 보다 100년, 200년 먼저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금속활자를 싹슬이해서 그때부터 일본에 출판이 시작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나라는 출판대국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나만 가진건 아니었는데 지금 강명관교수가 그런 의문을 가진 모든 이에게 시원한 대답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에 한정한, 왜냐하면 그 이전시대는 자료가 없기에, 책에 관한 모든 이야기다.  몇 년전 출간된 <조선출판주식회사>와 여러면에서 비슷한 내용이 중첩된다.  조선시대 책의 역사를 다루면서 이 <조선출판주식회사>의 존재나 참고여부를 밝히지 않은 것은 의외다. 두 책 모두 책과 출판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고려 금속활자에서 비롯된 인쇄술의 발전은 조선에 들어와 꽃을 피우는데  출판에 관한 모든 것은 국가가 결정하고 시행하는 구조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민간출판업이나 서점이 활성화되지 못했다. 활자를 만들고 소유하고 인쇄하고 공급하는 모든 과정이 국가주도로 이루어졌다. 왜 국가에서 책의 모든 것을 관장했는가. 바로 “국가가 지식의 공급처이고 지식의 유통주체라는 의미였다. 즉 금속활자 인쇄술은 소수의 지배자 양반을 위한 것이었다.”

 

조선의 인쇄장인은 국가관청에 소속되어 있었고 출간주체는 교서관이나 주자소였다. 개인을 위한 유통구조는 존재하지 않았고 조선초기 서점 설립 주장은 묻히고 만다. 그러니 출간되는 책의 내용은 대개 경서 사서와 백성들의 교화를 위한 도덕교과서였다.


정부 뿐만 아니라 사족들의 책에 대한 욕구또한 대단하여 중국으로부터 수입이나  거간꾼에 의존하는 경우도 많았다.  민간출판본인 방각본은 18세기 들어서야 나타나지만, 조선중기에도 서점은 없지만 책을 베끼거나 사적으로 인쇄하여 파는 이들의 존재가 확인되기도 한다. 금속활자와 목판본의 비교도 흥미롭다. 

 

조선출판주식회사와 비교하면 이 책이 보다 세밀하고 전거에 충실하며 저자 특유의 시니컬한 논조를 볼수있다는 점.  그리고 내용에 책값과 유통구조, 제책과정, 일본수출, 전란으로 인한 망실, 한글이라는 문자의 용도 등등이 독자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북한에서 전통문화를 대하는 자세가 민족의 유산인 동시에 부르주아의 잔재라는 이중성을 갖고있는 것처럼 우리 금속활자나 인쇄문화를 보는 눈도 역시 그럴 수밖에 없다.  민중의 생활향상에 어떤 역할도 하지못하고  근대를 불러오지도 못했지만 당대 지식 정보의 원천이자 문화대국으로서의 존재감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잃은게 너무 많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많은 문화재가 약탈되어 현재 일본에 있는 고서나 도자기가 우리보다 많을수 있다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종이를 만들거나 도자를 구워내는 장인의 기술맥이 단절된 것이다.  한지의 종류가 그리도 많은데 최상급 종이를 어떻게 만드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다.  강명관의 말중에 정약용의 책이 당대에 인쇄되었는지 필사되었는지 의문을 가졌다는데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도 많다.  
세계최초가 그리 중요한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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