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3 : 교토의 역사 -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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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3 교토의 역사

 

유홍준 

 창비 

 

일본답사기가 이제 교토에 이르렀다.

 

일본을 다녀온 한국인 치고 교토를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한국의 고도(古都) 하면 경주가 떠오르듯이 일본은 교토가 1,000년이 넘게 수도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거리 쓸거리가 너무 많은 탓에 저자는 답사기를 교토의 역사편과 명소편으로 둘로 나눠 서술하고 있다. 모르고 있었는데 교토 역시 나라지방과 마찬가지로 한반도계 도래인의 흔적이 너무 깊게 배어있는 유적도시였다. 신라계도래인 하타씨가 세운 광륭사, 목조반가사유상, 가쓰라강의 도월교, 청수사, 고구려계 도래인이 세운 야사카신사, 법관사 오중탑, 하타시가 세운 후시미의 이나리신사 등등...

 

그중 광륭사(고류지)는 서기 603년 쇼토쿠태자의 명으로 건립한 7대사찰중 하나로 교토에서 가장 오랜된 사찰이라고 한다. 봉강사, 태진사 등 여러 이름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광륭사로 불린다 한다. 그간 관륭사는 몇차례 소실과 중건을 거듭했지만 전해내려오는 불상과 회화만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영보전에 전시되고 있다. 특히 광륭사의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상과 매우 흡사하다.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인지 일본 현지에서 제작된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삼국시대 양식임에는 틀림없다. 광륭사의 창건주 진하승과 하타씨들은 교토라는 도시를 고대부터 개척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요즘 한국인 여행기에 거의 나오는 아라시야마 일대 대언천의 재방을 만들고, 이름도 멋진 도월교를 건설한 사람도 모두 신라계 도래인 하타씨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민 1세대인 셈이다.

 

 

일본 삼대 마쓰리중 하나인 기온마쓰리는 야사카신사에서 주관하는데 이 신사는 고구려계 도래인이 세운 신사라 한다. 역시 이들이 세운 법관사는 현재 오중탑(오층탑)만 남아있다. 기온마쓰리는 거의 한달간 계속된다고 한다. 유곽의 거리였던 기온거리는 지금은 식당과 상점가로 변하였지만 요정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교토 남족의 후시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거점이었는데 현재는 붉은 도리이로 유명한 이나리 신사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후시미성은 파괴되어 복숭아밭이 되었기에 그 시대분류명을 복숭아산 즉 모모야마시대라 하고 성의 여러 건물은 고대사를 지을 때 옮겨다 썼다고 한다. 이런걸 보면 유홍준선생 설명의 진가가 두드러진다.

 

 

이나리신사 역시 하타씨 일족인 진이려구가 711년에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이 이나리신사의 강열한 붉은 도리이, 센본토리이는 관광객들이 사진에 담아오려는 단골 출사지인데 히데요시의 후시미성이 몰락할 당시 2,000여명이 할복자살했고 그 피가 나무복도를 빨갛게 물들었다고 한다. 그 붉은 나무판자는 후에 재활용되어 삼삽삼간당 옆에있는 사찰을 지으면서 천장목재로 사용했고 이를 피의 천장이라 부른다고. 이 대목을 소개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피의 정서라는 표현을 했는데 자결을 선호하는 일본의 문화가 낳은 한 단면인 듯하다. 피의 천장이라니! 사찰에! 그것도 내력을 감춘 것도 아니고.

 

헤이안시대를 밝힌 고승 공해와 최징 두 승려에 대한 이야기도 상세히 들려준다.

밀교에 대한 설명도 간략하지만 충실하다. 어떤 스님이 이리도 친절하게 정확하게 일본의 불교와 밀교를 설명할수 있겠나. 아마도 없을 듯.

 

히에이잔 연력사의 근본중당에는 최징이 직접 조각했다는 약사여래상이 있는데 비불이라 오늘날까지 공개된 적이 없다고 한다. 일본에만 있는 이 비불의 전통은 대체 뭔지.

영산 히에이잔과 고찰 엔랴쿠지는 내게도 낯설지 않은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했는데 우리나라 사람에게 입당구법순례기로 유명한 원인(엔닌)을 비롯, 임제종을 개창한 영서(榮西)에사이, 정토종의 법연(法然)호넨, 조동종의 도원(道元)도겐, 일련종의 일련(日蓮)니치렌 등이 주요 인물들이다.

 

디디어 교토답사 일번지라는 청수사(기요미즈데라)가 나오는데 이 역시 백제계 도래인 사카노우에가 창건한 절이라 한다. 이 사람이 일본 역사상 최초로 쇼군 즉 정이대장군의 칭호를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현재의 청수사는 1633년 재건된 것이다. 그나마 메이지의 폐불훼석때 거진 파괴되어 15만평의 부지중 14천평만 남았다고 한다. 550년된 청수사의 마굿간은 유야설화와 관련있어 일본인에게는 친숙한 공간이라 마치 우리나라 광한루와 춘향전의 관계 같다고 하는데 나는 이 마굿간을 본 기억이 없다. 이 답사기가 주는 주요한 공능중 하나라 생각된다.

 

교토를 가보긴 했지만 사실 교토를 보았다고 말할수도 없을 정도라 직접 눈으로 보고싶었던 여러 유적유물들을 거의 지나쳤는데 유홍준선생이 예찬한 삼십삼간당에대한 설명을 읽고 사진을 보니 마치 종묘의 실루엣을 연상시키는 듯 자태가 장엄했다. 가복싶은 마음은 사진으로 대신한다.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읽은 답사기지만 유홍준선생이 미술사학자이다보니 역사학도인 내 입장에서는 늘 2%부족함을 느끼는데 역사도시인 이 교토의 무대에서는 좀더 심하게 느껴진다. 답사대상이 고미술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토는 고대는 물론 근현대까지 우리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그런 역사적인 사건과 대상들이 너무 생략되었다.

 

아쉬운점은

 

광륭사의 미륵반가상을 소개하면서 이 목불이 20세기 초에 부분 변조되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점이다. 야스퍼스가 예찬을 했다는 사실만 부각시켰는데 연합뉴스 2009918일자에 이윤옥 외대교수가 주장한 글에 의하면 20세기 초에 이 불상의 얼굴이 일본인의 얼굴이 아니라는 이유로 얼굴과 손에 칼을대 부분수리를 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학자 나카이 신이치가 밝혀낸 사실이다. 또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광륭사 목조미륵반가상을 소개한 글에도 부분 변조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민족신문 2011118일자 도서소개 코너에 <신일본속의 한국문화답사기> 에도 광륭사 미륵이 성형수술을 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유홍준선생이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소개하지 않은 것인지 알수 없다. 아무튼 원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교토는 근대에도 역사의 주 무대였는데 천황제 국가로 변모한 메이지유신 당시 이를 가능하게 이끈 풍운아 사카모도 료마의 조난지와 묘소가 교토에 있다. 막부말기 신선조의 본거지이고, 개화승 이동인을 교육시켜 조선에 보내고 한반도내 각지에 포교당을 설립했던 침략주의 사찰 동본원사가 교토에 있다.

그뿐인가 교토로 천도하고 백제인이 어머니 였다는 간무천황의 묘소가 있고 민비암살의 실질 최고 책임자이자 한일 강제병합의 주모자인 메이지천황의 무덤이 바로 후시미에 있다.

역사가의 답사라면 이런 사실이 반드시 언급되었을테지만 미술사가의 답사라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

p. 176에 공해의 초상을 모신 어영당을 御靈堂으로 인쇄했는데 御影堂의 잘못이고

p. 280에 범종의 높이는 22m가 아닌 2.2m 이다. 다음번 개정판에 오류가 바로잡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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