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가 옳았던 이유 - 프로메테우스의 꿈과 좌절 테리 이글턴 컬렉션
테리 이글턴 지음, 박경장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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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크스주의는 끝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제껏 시도된 그 어느 비판보다 가장 면밀하고 엄격하며 포괄적인 자본주의 비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위력을 떨치는 한 마르크스주의도 마찬가지로 자기 본분인 비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보면, 자본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 혈기왕성하다. 전 지구적 규모에서 자본은 여느 때보다 더욱 집중되고 약탈적이며, 노동계급은 양적으로 늘어났다.

부와 권력의 엄청난 불평등, 제국주의 전쟁, 강화된 착취, 점점 더 억압적인 국가 등 자본주의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인간 파괴를 의미할 수 있고, 종말론적 환상은 오늘날 엄연한 현실주의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방화범이 교활하게 활기치고 있다고 해서 소방 활동이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이다. 자본의 끊임없는 재생산은 자본주의가 벗어날 수 없는 경계이다. 자본주의는 거대한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자본주의가 발생시킨 부가 모두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신화는 조금도 달성되지 않았다.


2. 마르크스주의는 도그마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피와 눈물로 구축되었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는 마오쪄둥의 중국이나 스탈린의 소련 못지않게 혐오스러운 노예제와 대량 학살, 폭력과 착취의 역사가 낳은 산물이다. 다만 자본주의는 충분히 오래 살아남아 이런 공포의 많은 부분이 잊혔는데, 스탈린주의나 마오주의는 그렇지 못했을 뿐이다.

마르크스 자신은 경직된 도그마와 군사 테러, 정치 억압과 전제 국가 권력을 비판했다. 사회주의 운동은 냉철한 유물론적 주장이지, 신심에서 우러나온 관념론자의 주장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숙련되고 교육받은 정치적으로 세련된 대중, 번성하는 시민 조직, 발전된 기술, 계몽된 자유주의 전통, 민주주의 습관 등이 필요하다.

역설적으로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 작업의 신뢰를 떨어뜨렸다기보다 그 타당성을 입증한다. 스탈린주의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명확한 설명을 원한다면, 마르크스주의로 가야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어떤 물질적 조건에서 발생하고 어떻게 기능하며 어떻게 실패할 수 있는 지를 알아야 한다.


3.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두 개념, 즉 계급투쟁과 생산양식을 한데 묶어 새로 마련한, 장기적인 역사 변화에 대한 이론이자 실천이다. 마르크스는 역사가 어떤 특정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역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엄청난 부도 소유하지 않으며 어떤 전투도 벌이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행하고 소유하고 싸우는 것은 인간, 실제 살아 있는 인간이다. '역사'는 마치 별개의 존재인 양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의 활동일 뿐이다."


4.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예언자였지 점장이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가 "현실이 맞추어 가야 할 이상"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 대신 그는 공산주의를 "사물의 현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 운동"으로 보았다.

마르크스의 요점은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가 도래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현재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과 같은 사람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악성 유토피아주의의 한 형태가 실제로 근대에 악영향을 끼쳤지만, 그것의 이름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문화와 경제에 단 하나의 체제를 강요하여 모든 병폐를 치료할 수 있다는 광적인 생각으로, 그 이름은 자유 시장 주의다.


5. 마르크스주의는 경제환원론이 아니다.
마르크스에게 역사의 진로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계급투쟁이며, 계급은 경제적 요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에게 계급은 사회 구성체이자 공동체이자 정치 현상이다. 계급은 스스로를 계급으로 의식하게 될 때라야 비로소 온전한 계급이 된다.

마르크스에게 노동은 경제적인 것을 넘어 훨씬 많은 것들을 포함한다. 노동은 젠더와 혈연관계와 성(性)을 포함한다. 인간은 의미 있는 동물이므로, 노동은 결코 단순히 기술적이거나 물질적인 사건일 수만은 없다. 노동은 인간이 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6. 마르크스는 기계적 유물론자가 아니었다.
마르크스에게 사람은 자신의 물질적 환경을 변형하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변형하는 생물이다. 그들은 역사나 물질이나 정신에 전당 잡힌 노리개가 아니라, 자신의 역사를 만들 능력이 있는 능동적인 자기 결정적 존재였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이 계몽주의 유물론과는 다르게 민주주의적 유물론임을 의미한다.

기계도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와는 아주 다른 방식일 것이다. 기계의 물질적 구조는 우리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계는 육체적 욕구가 없으며, 그런 욕구와 긴밀하게 연결된 인간의 정서적 삶이 없다. 인간의 사유는 감각적이고 실제적이며 정서적인 맥락과 분리될 수 없다. 객관적인 세계를 인간 실천의 결과로 사유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은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거나 '신은 없다'같은 우주에 관한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동물이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관한 이론이다.


7.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강박증이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계급은 어떻게 느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다. 특정한 생산양식 안에서 어디에 위치하는가(노예, 자영농, 소작인, 자본가, 금융업자, 노동력 판매자, 소자본 소유자)의 문제인 것이다. 계급은 자신의 구성을 늘 바꾼다. 그렇다고 계급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최고 경영자가 스니커즈에 청바지를 쿨하게 차려입는 동안, 10억 명 넘는 사람들이 매일 굶주린다. 슬럼 거주민들은 전 세계 도시 인구의 3분의 1에 이르고, 도시 빈곤층은 적어도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들은 고전적인 의미의 노동계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생산 과정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노동계급의 사망은 너무나 과장된 것이다. 계급이 죽었다고 확신하고서, 대신 문화와 정체성, 인종과 성으로 눈을 돌린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에서 이런 문제들은 예전에도 늘 그랬듯이 사회계급과 뒤얽혀 있다.


8. 마르크스주의는 폭력 혁명을 옹호하지 않는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량 학살자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범죄는 어떠한가? 자본주의의 역사는 전 지구적 전쟁과 식민주의 착취와 집단 학살과 기근의 이야기다. 왜곡된 마르크스주의 해석이 스탈린주의 국가를 낳았다면, 자본주의의 극단적 변이는 파시즘 국가를 낳았다. 자본주의의 끔찍한 역사에 비하면, 쿠바 혁명 같은 사건은 티 파티에 불과하다.

혁명은 탈주 기차가 아니라 비상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의 경우, 이는 조직된 노동 계급이 다양한 동맹과 더불어 부르주아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는 것을 말한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폭넓은 계급이다. 혁명은 소규모 반란 집단이 아닌 다수의 행동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민주주의 혁영일 수밖에 없다. 비민주적인 소수는 지배계급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의회민주주의에 의구심을 갖는데, 그것이 민주적이서가 아니라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아서이다. 의회는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영구적으로 위임하라고 설득하면서도, 통제권은 거의 주지 않는다. 혁명은 사람들이 대중적인 위원회와 회의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에 관한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으로, 현재 취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훨씬 민주적이다.


9. 마르크스주의는 국가를 믿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국가에 대해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그가 완강히 반대한 것은 중앙 행정부라는 의미의 국가가 아니었다. 마르크스가 더 이상 보지 않기를 희망했던 것은 폭력의 도구로서의 국가이다. 사라져야 할 것은 지배적 사회계급의 통치를 떠받드는 권력이다. 국립공원과 운전면허 시험센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민 주권에 대한 진심 어린 신봉자였다. 그는 민주주의를 너무 소중히 여겼기에 의회에만 맡겨 둘 수가 없었다. 민주주의는 지역적으로, 대중적으로 모든 시민 사회 기관에 두루 퍼져야 했다. 마르크스가 인정했던 국가는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정부가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다스리는 지배였다.

마르크스가 파리 코뮨에 대해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바로 인민민주주의를 말한다. 프랑스 혁명가 오귀스트 블랑키가 평민을 대표하는 지배라는 의미로 만들어 낸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을, 마르크스 자신은 평민들에 의한 통치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10. 마르크스주의는 급진적 운동에 기여했다.
"공산주의는 서로 다른 형식의 지배와 착취(계급, 젠더, 식민주의)가 갖는 상호 연관성과 이들 모두를 철폐하는 것이 각각의 성공적 해방의 실현을 위한 근본적 토대임을 인식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정파 프로그램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성의 권리를 꾸준히 옹호하면서도, 세계 반식민주의 운동도 가장 열렬히 지지했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 주의는 근대 시기의 세 가지 가장 위대한 정치투쟁(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여성 해방, 파시즘에 대한 싸움)의 선두에 섰다.

마르크스가 인간의 이름으로 자연을 약탈한 또 다른 계몽적 합리주의자라는 비난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는 미래 세대의 복지가 걸려 있는 자연적인 지구의 조건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면서 경제 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자연주의자요 유물론자로서 마르크스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임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생물임을 망각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결론>
마르크스는 개인에 대해선 열렬히 신뢰했고 추상적 독단에 대해선 깊은 불신을 품었다. 그가 보기를 희망했던 것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이었다. 그가 생각한 훌륭한 삶의 모델이란 예술적 자기표현이라는 생각에 토대를 둔 삶이었다.

마르크스는 물질적 생산을 물신화하지 않았다. 그의 이상은 여가이지 노동이 아니었다. 그가 경제적인 것에 그토록 지칠 줄 모르게 주목했던 이유는, 그것이 인류에게 끼치는 힘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의 유물론은 확고한 도덕적, 정신적 신념과 온전히 양립 가능하다.

그는 사회주의가 자유와 시민권과 물질적 번영이라는 중간계급의 위대한 유산의 계승자라고 보았다. 자연과 환경에 대한 그의 견해는 놀랄 만큼 시대를 앞서갔다. 마르크스 작업이 잉태한 정치 운동보다 여성 해방, 세계 평화, 파시즘에 대한 저항, 식민지 자유 투쟁에 대해 더 확고하게 옹호한 투사도 없었다.

이토록 희화화된 사상가가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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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마르크스는 직접 민주주의자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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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지음,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 디플롯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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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전쟁이 한창 진행중인 어느 날, 르완다군에 포위되어 식량이 바닥난 콩고의 수도 킨샤샤의 육군사무소를 백인 여성 '클로딘 안드레'가 급히 찾는다.
"장군을 만나고 싶어 왔습니다."
"지금 바쁘십니다."
"기다리죠."

눈부신 붉은 머리의 백인 여자가 기다린다는 전갈을 들은 장군은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부인?"
"당신네 병사들이 공원의 나무를 베고 있어요."
"그래서요?"
"저는 보노보 12마리를 보살피고 있어요.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인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어딘가 살 곳이 필요합니다. 보노보는 오직 콩고에만 사는 콩고의 자랑거리입니다. 이 공원은 보노보를 위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폭탄이 건물 근처에 떨어져 담장이 흔들리고 천장에서 석고 조각이 떨어졌다. 안드레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네 병사들에게 벌목을 중단하라고 말해주세요."
"부인, 지금 가셔야 합니다. 여긴 안전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폭탄이 떨어졌다.
"이 보노보들에게는 보호가 필요합니다."
장군이 말했다. "지시 내리겠습니다."
안드레는 잠자코 서 있었다. 또 다른 폭탄.
"당신을 이 공원의 관리자로 임명합니다! 병사들에게도 전달될 겁니다. 자, 이제 그만요, 부인, 부탁입니다!"

안드레는 보노보 63마리 이외에도 회색앵무, 갈라고, 개, 고양이, 큰흰코원숭이를 돌보았고, 킨샤샤 일대에 10개의 '친절클럽'을 열어 어린이들에게 동물에게도 생각과 감정이 있으며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가르쳤다.

안드레가 보호소 방문자들을 상대로 강연하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일어나 항의했다.
"콩고에선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어요. 이 보노보들이 아이들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고 있는게 맞는 건가요?"
"저는 아이들에게 동물에게 친절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어린이들이 서로에게도 친절해집니다."

심리학자 고든 호드슨과 크리스토퍼 돈트는 동물을 대하는 태도와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더 크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민자나 흑인이나 소수 민족 등 사람 외집단을 동물로 '비인간화'하는 경향이 더 강했다. 반면에 동물과 사람이 더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민자를 덜 '비인간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몇십 년 사이에 서구 산업화 세계에서는 사람과 개의 거리감이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반려견에게 아낌없이 쏟는 사랑을 그저 현대인이 누리는 또 하나의 사치로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 사랑은 훨씬 더 오래된 것이다.

세계에서 평등주의가 가장 잘 실천되고 있는 마르투 부족민이 보여주는 사람과 개의 사랑은 매우 인상적이다. 마르투족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다른 선주민들이 그러하듯이 땅과 그곳에 사는 모든 동물들과 총체적이고 심오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한 마르투족 사람은 인류학자 더그 버드에게 "야생개 딩고들이 우리의 어머니입니다"하고 말한다.

이 말은 은유가 아니다. 어른들이 수렵과 채집을 위해 멀리 야외로 나가면, 딩고들은 자기 새끼들에게 해주는 것처럼 먹은 것을 게워냈다. 아이들은 단백질이 풍부한 이 곤죽을 불에 구워 먹으면서 허기를 달랬다. 오스트레일리아 오지에서는 수천 년 동안 개가 사람 가족의 일부로 살아왔다. 놀랍도록 평등한 이 사회에서 딩고는 가족이었다. 사람과 개의 관계에서 걔를 일가족에서 몰아내게 된 것은 산업화였을 것이다.

유럽의 혈통견들은 놀랍게도 아주 최근에 교배된 품종이다. 빅토리아 시대 이후 사람들이 개의 품종을 교배하면서 개의 외모가 중요해졌고, 개는 사고파는 상품이 되었다. 이로써 개 품종의 우열이라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유럽의 혈통견은 신분과 계급제에 병적으로 집착하던 문화의 산물이었으며, 이 집착에서 나온 것이 우생학 운동이었다.

조사 결과, 개 품종들 사이에 뚜렷한 우열이 있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은 사람 집단 간에도 뚜렷한 위계가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르투족처럼 더 평등한 사회의 사람들은 개를 가족의 일원으로 더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개를 대하는 태도는 다른 집단의 인종을 대하는 태도에도 반영된다. 개에 대한 사회지배 성향이 높을수록 '열등한' 집단에 속하는 타인을 동물로 바라보기 쉽다.

우리는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적자는 신체적 최강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적자란 당장의 '국소적 환경에 대한 적응 능력'을 말한다. 자연의 세계에는 우월이 없다. 살아남는 것이 '적자'이다. 그리고 인간은 '다정함'으로 적자가 되었다.

인간은 왜 이렇게 정이 많은 존재가 되었을까? 그 답을 '가축화'에서 찾는 연구자가 늘고 있다. 가축화란 인간의 목적에 맞도록 야생 식물이나 동물을 길들이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가축이 되었고, 가장 높은 수준의 가축화를 이룬 종이다. 애착과 접촉, 호기심과 놀이, 공감과 협력은 인간성의 본질이 되었다. 우리는 협력이 가져올 혜택을 신중하게 고려할 줄 알았다.

8만 년 전에 일어난 사람의 자기가축화로 폭발적 인구 증가와 기술 혁명이 동시에 일어났다. 친화력이 여러 집단의 혁신가들을 하나로 연결함으로써 기술혁명을 추동한 것이다. 자기가축화가 우리 종에게 준 막강한 능력으로 우리는 세계를 제패했다. 그리고 네안데르탈인 같은 다른 사람 종들은 하나하나 멸종되어 사라졌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호모 사피엔스 종이 지닌 최고의 미덕과 강점을 잘 설명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안에 내재된 최악의 본성도 설명해준다. 우리는 탁월한 친화력과 극악무도한 잔인성을 같이 갖게 되었다.

자기가축화를 통해서 친화력이 강화된 우리 종에게 새로운 형태의 공격성이 생겨났다. 우리가 더 강렬하게 사랑하게 된 이들이 위협 받을 때 사람은 더 큰 폭력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위협 받는다고 느낄 때, 다정함, 협력,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종 고유의 신경 메커니즘이 닫힌다. 이때 우리는 연결감, 공감, 연민을 느끼지 않게 되고, 타인을 '비인간화'하게 된다.

비인간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인원화를 통해 우리는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유인원으로 부르거나 유인원에 비유하면 사람들 심리에 도덕적 배제가 발생하며, 이렇게 유인화의 표적이 된 개인이나 집단은 인권을 지켜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다. 편견보다 유인원화가 현재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인종 간 격차를 더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흑인에 대한 유인원 비유로 유럽 사회는 노예 무역에 대한 반감과 상류층 지식인의 도덕적 딜레마를 해소할 수 있었다. 유인원 비유는 노예 무역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고, 그 대상이 아프리카 인으로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19세기에는 아일랜드 인이, 세계 대전 전에는 독일인, 중국인, 프로이센인, 유대인이 유인원 소리를 들었고, 2차 대전 시기에는 일본인들을 원숭이라고 불렀다.

<인류진화도>는 진화가 선형적으로 발전하고, 그 정점에 선 존재가 사람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놓았지만, 강력한 비인간화의 척도를 보여준다.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에서 절반이 다른 민족 집단은 미국인보다 사람으로 덜 느껴진다고 답했다. 특히, 무슬림이 미국인보다 10점 낮은 점수를 받아 가장 비인간화되었다. 무슬림을 비인간화한 사람들은 가장 높은 비율로 중동에서 고문과 드론 공격 모두 허용할 것을 주장했다.

우리 종이 다른 사람 종들을 정복할 무기를 생각해낸 이래로 우리는 지능을 과하게 강조해왔다. 우리는 지능을 토대로 확고한 구분선을 긋고 동물에게도 사람에게도 잔인한 고통을 가해왔다.

우정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평등한 사상이다. 인간이 구석기 시대를 지배하는 강력한 포식자이던 시기에 개는 송곳니 매서운 육식동물에서 개로 진화했다. 개는 그들 종의 강력한 성공 무기였던 두려움과 공격성을 사용하는 대신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될 만한 공통 기반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나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나로 평가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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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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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덮었다. 어머니가 생각나면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여러 번 눈물이 차 올랐다. 책을 읽는 내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이 떠올랐고, 책을 덮는 마지막까지도 나는 돌아가신 두 분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병상에 누운 후 돌아가실 때까지, 그 후 10년 뒤 어머니도 돌아가실 때까지, 십 수 년의 시간을 나는 왔다 갔다 하면서 부모님의 곁을 지켰다. 그러면서 나는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죽음 또한 삶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끼기에 죽음은 휴식이었고, 삶의 마무리였다. 마지막 기간의 처연하고 고통스러운 삶에 휴식을 주는 자비의 손길이었다. 나는 슬픔과 아픔 속에서도 평안을 얻었고, 마음속으로 어머니의 평화와 안식을 기원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집에서 계셨다. 형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고,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매일 부모님 집으로 출퇴근을 했다. 늙은 부모님을 돌보는 일은 매우 힘이 들고 지치는 일이었다. 형도 나도 생활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포기했던 많은 것들에 비해, 들이는 노력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작았다.

그러나 마지막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나름 편안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매우 많이 힘들어했다. 특히, 죽기 며칠 간은 매우 고통스러워 했다. 우리는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암울한 절망감 속에서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제 죽음은 나의 문제가 되었다. 나는 많은 순간들을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게 되었다. 미국의 현직 외과 의사가 지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아버지와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했던 그 힘든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그 힘들고 괴로웠던 죽음의 시간은 우리 가족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똑같다는 것을. 누군가 태어나는 것은 만인이 평등하다고 했지만, 죽음 또한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난 내가 돈이 많았다면, 아니면 인맥이라도 많았다면, 아니면 의사 가족이라도 있었으면 부모님을 좀 더 편안하게 해드릴 수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괜한 자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돈이 많은 사람도, 심지어 노인 전문 의사도 죽음 앞에서는 똑같이 고통스러웠고, 똑같이 무기력했다. 요양원에 수용되어 '휠체어에 묶인 채 긴장병 환자처럼 어린애 취급을 받으며 지내'다가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그 과정에서 자유와 삶의 가치는 찾을 수가 없었다.

진짜 문제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죽는 것은 무너지는 것이다. 삶이 죽음을 향해 무너져가는 그 시간 동안, 누구도 고통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존엄을 지킬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좌절했고, 다시 다짐을 했다. 내 죽음은 내가 결정하자. 그러나 책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는 죽어가는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책은 말한다. 현재 요양 체계의 문제점은 요양 시설이 당사자가 아니라 자식들을 위해 운영된다는 점이라는 것을. 부모님의 안전에만 몰입해 있는 자식들에 맞춰진 운영을 하면서 당사자의 사생활과 자유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우리가 직면하는 한계와 역경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삶의 주인으로서 자율성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핵심적 가치다. 그러나 우리는 가치와 목적이 있는 삶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환경을 만들지 못했다. 우리는 삶이 기울어 가는 마지막 단계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의료 전문가들에게 맡겨 버렸다.

늙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의학과 의학이 만들어 낸 기관들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관점 자체가 부재한다. 의학은 마음과 영혼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신체적인 건강을 복구하는 데 집중한다. 인간의 욕구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 기술적인 전문성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우리 운명을 맡기는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현재 역사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나이가 들면 의학과 수용소같은 시설에 자율권을 넘겨야 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요양원 혹은 양로원에서 시들어 가다가 병원에서 죽어가는 길을 대체하는 방법이 늘고 있고, 그 기회를 붙잡으려는 사람이 수백 만 명이다. '어시스티드 리빙' 아파트, ‘에덴 올터너티브’ 프로그램, '그린 하우스' 프로그램 등은 요양원을 혁신하려는 새로운 시도이다. 늙어서도 삶을 의미 있게 살도록 만들려는 새로운 개념이다 .

그래서 노인들을 그냥 안전하게만 돌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필요하다. 그들은 생활하는 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자율성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임무가 안전이라는 미명하에 사람들의 선택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선택의 범위를 넓혀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의료계 종사자들은 사람들의 건강과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 주된 임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이상의 일을 해내야 한다. 바로 환자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죽어 가는 환자를 돌보는 문제에 이런 사고방식을 도입한 것이 바로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떠오른 완화치료 분야다.

호스피스 케어는 생명 연장에 목적을 두고 있는 일반적인 의료 행위와 우선 순위가 다르다. 호스피스 케어는 간호사, 의사, 성직자, 사회복지사 등을 동원해서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

호스피스 케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다시 한 번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의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했을 때 나는 호스피스 병원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것이 주로 종교 시설에서 운영하고, 들어가려면 몇 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만 주워듣고 호스피스 병원을 알아볼 생각도 못했다. 가정 방문 호스피스 케어 같은 것은 아예 알지도 못했다. 좀 더 신경 써서 알아봤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질병과 죽음 앞에 무지하고 미숙하고 무성의했다. 아버지가 병상에 눕고 돌아가실 때까지 많은 시행 착오를 겪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많은 시간 동안 회한에 시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개월 후 어느 날, 자려고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갑자기 울음을 쏟아냈다. 뱃속 깊은 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나는 기어코 서럽게 울어대고 말았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리 신경 쓰고 조심했지만, 그래도 부족하고 무지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간병인만 옆에 두고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 시신 앞에서 주저 앉고 말았다. 십 년의 시간을 옆에 있었는데 마지막 돌아가시는 순간 옆을 지키지 못한 것이 너무 억울했다. 가족도 없이 혼자 떠난 어머니가 너무 안타까웠고, 너무 미안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수발하면서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에게도 자주 짜증을 냈다. 그러나 그 힘들고 부끄러웠던 시간은 어머니에게도, 나에게도 위로의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 요양보호사에게 잘 돌봐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자식들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너무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부끄러웠고 슬펐다.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아무 것도 준 게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구나. 그러면서도 위안이 되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외롭지 않았구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개월 후인가 퍼뜩 깨달았다. 나는 어머니를 돌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것은 순전히 내 입장이었다는 것을. 어머니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머니가 어떤 마음인지 깊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나는 그저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때도 나는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자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꾸 마음을 할퀴었고, 부족했던 순간들이 자꾸 생각났다. 그때마다 나를 달래주고, 나를 위로해 준 것은 어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었다. 나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내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했다. 그 부대낌이 삶이었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함께 하는 것. 어머니도 나도 섭섭함과 미안함과 안타까움과 고마움을 공유했다.

그 시간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를 달래주었다. '그래도 나 열심히 했잖아. 기를 쓰고 했잖아. 이제 와서 자책할 필요는 없어' 죽어가는 어머니를 돌보았던 그 힘들고 우울했던 시간이 이제는 나를 위로하는 시간이 되었다.

책은 죽음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사실 그 이야기들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에 관한 이야기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죽는 순간까지 어떻게 삶의 의미를 가져가고, 어떻게 내 삶의 자유를 지키고, 어떻게 삶의 존엄성을 지켜갈 것 인지에 관한 질문과 고민이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기억을 떠올렸고, 많은 생각을 했다.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문제는 어떤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기 어려운 때가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해야 한다'

나는 내 죽음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면서도 두려웠다. 막상 그 때가 되었을 때,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미련을 버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 마다 나는 다짐해왔다. '이깟 삶에 무슨 미련 따위가 남았을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도록 마음을 단련하자.'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이깟 삶, 미련 없이 떠날 게 아니라 이 삶, 여한 없이 떠나야 한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만 다짐할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죽는 순간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내 삶의 주인은 나이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고민하고 걱정할 것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을.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니,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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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걸작은 만들어진다
톰 행크스 지음, 홍지로 옮김 / 리드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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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도서관에 가면 일단 신간 코너부터 들른다. 그 중에서도 영미 소설 코너를 제일 먼저 들른다. 아, 반납할 도서가 있을 경우에는 일단 반납부터 한다. 그 다음에 영미 소설 신간들을 흩어본다. 눈에 띄는 책이 없을 경우에는 인문이나 과학 분야의 신간들을 흩어본다. 만화가게에서도 그러지만 도서관에서도 동냥 나선 거지 마냥 '뭐 없나'하고 게걸스럽게 책을 흩어본다. 아마 뷔페에서 넓은 접시 하나 들고 눈을 반짝이며 샐러드 코너를 갔다가, 초밥 코너를 들렀다가, 고기 코너를 살폈다가, 후식 코너를 배회하는 모양과 비슷할 거다.

그날은 처음부터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었다. 일단 책이 두꺼웠다. 난 소설의 경우 두꺼운 책을 선호한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은 경우 소설이 두껍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의 필력이 받쳐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풍성하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들기 위함인데, 책이 얇으면 이야기가 너무 일찍 끝나서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두꺼운 소설이 재미있으면 그 즐거움을 그만큼 오래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얇은 책에는 손이 잘 안 가고, 두꺼운 소설에 먼저 눈이 가는데 그 책은 두꺼웠다. 그 다음에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것은 작가의 이름이었다. '톰 행크스'

톰 행크스? 그 톰 행크스인가? 책을 빼서 작가 소개를 보았다. 맞다. 그 톰 행크스 맞다. '필라델피아', '포레스트 검프',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빅', '다빈치 코드',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유명한 영화배우 톰 행크스 맞다. 그가 소설도 쓰다니? 게다가 이런 두꺼운 소설을? 소개글을 더 읽어보니 이번이 처음 소설이 아니다. 그 동안도 그는 글을 써왔다. 이 책은 그의 첫 장편소설일 뿐이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최정상의 헐리우드 영화 배우가 장편소설이라니? 그 솜씨는 어떨까? 호기심에 책을 빌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꽤 훌륭한 소설가다. 그의 연기 실력 만큼이나 그의 글 솜씨도 뛰어나다. 그의 영화 만큼이나 그의 소설도 재미있다. 잘 깎여진 밤톨 같은 그의 머리 모양처럼 이 소설도 깔끔하고 산뜻했다. 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은 그가 출연했던 헐리우드 영화를 봤던 느낌과 비슷했다. 군더더기 없는 산뜻한 구성,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깔끔한 화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전개, 살짝 터치만 하고 깊어지기 전에 멈추는 감정선,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정형화된 캐릭터, 따뜻하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상투성. 헐리우드 영화의 특징이 소설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꽤 재미있다.

내가 가장 놀란 것은 그의 글 솜씨다. 그의 연기력 만큼이나 그의 글 솜씨도 빼어나다. 글 못쓰는 작가들이 수두룩한 세상에서, 영화배우인 그의 글 솜씨는 놀랍다. 왠만한 작가들 뺨친다. 영화배우가 아니라 작가라는 명함을 내밀어도 부족하지 않을 실력이다.

'그렇게 걸작은 만들어진다'는 영화에 관한 소설이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야기로 담았다. 마블의 어벤져스처럼 히어로 만화가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의 전반적인 과정을 담고 있는데, 그만큼 등장 인물도 다양하다. 만화 캐릭터의 모델인 참전군인, 참전군인의 조카이면서 원작자인 만화가, 만화를 보고 영화를 구성하는 정상급 감독, 호텔 직원으로 있다가 감독에게 발탁되어 영화계를 쥐락펴락하는 제작자, 그리고 수 많은 스태프들.

소설은 영화 제작의 단계 단계 마다 그 중심 인물을 따라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톰 행크스는 그 등장 인물들에게 저마다의 이야기를 부여했다. 등장하는 한 명 한 명의 삶이 아기자기하게 생동감이 있다. 빠져들만 하면 중심 인물이 전환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되어서 흐름이 깨지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 여럿의 인물 각각에게 자신만의 삶을 부여하는 건 대단한 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각의 인물들이 자기 이야기를 탄탄하게 굳히면서도 하나의 긴 흐름 속에 녹아들어 있다. 마치 모듈을 조립해서 만들어지는 완성품을 연상시켰다. 내 뇌피셜이지만 톰 행크스가 꽤 오랜 기간 공을 들여서 글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부러웠다. 이런 대배우가, 일생을 영화에 바쳐서 살아온 노배우가 글까지 이렇게 잘 쓰다니. 글 쓸 시간이나 있었나? 역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재능이다. 톰 행크스는 배우로서도 작가로서도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그 재능을 꽃 피우는 제일 마지막 열쇠인 '노력'이라는 재능까지 그는 갖추고 있다. 경제학자이면서 록커이면서 동시에 작가인 '요 네스뵈'마저 생각났다. 질투가 났다.

배우의 소설이라는 호기심에서 읽었지만 다 읽은 후에는 그는 내게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쉬움과 호기심이 남는다. 그의 소설은 헐리우드 영화들 만큼이나 '웰메이드' 작품이다. 완성도, 연출력, 스토리 텔링등 뭐 하나 나무랄 것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2% 부족하다.

재미있고 훈훈하고 따뜻한 소설이지만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 없다. 감동이 부족하다. 대중 소설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욕심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통속 소설에서도 감동은 있다. 정신을 때리거나, 가슴을 후벼 파거나, 온 몸을 뒤흔드는 감동은 아닐지라도 촉촉히 젖어드는 감동은 있다. 상투적이고 진부한 표현이지만, 열정이라고 할까 아니면 혼이라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작가 정신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나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아쉽다.

그의 글 솜씨에 치열한 주제 의식까지 더해진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그가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러나 여전히 배우로서도 왕성히 활동하는 그에게 그런 글을 쓸 시간이나 있을까? 검색해보니 톰 행크스는 56년 생이라고 한다. 하릴없이 뒤로 빼며 늙은이 행세나 하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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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웅의 AI 강의 2025 - 인공지능의 출현부터 일상으로의 침투까지 우리와 미래를 함께할 새로운 지능의 모든 것
박태웅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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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에 쓰여진 이 책은 2023년 발행된 '박태웅의 AI 강의'의 개정증보판이다. 저자가 개정증보판을 1년 만에 내게 된 이유는 'AI 분야는 한 달에 몇 년 치 시간이 흐르는 느낌'때문이다.

한 달이 몇 년 치라는 저자의 말이 나는 크게 와 닿는다. 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바둑 경기에 승리하면서 전 세계가 AI에 열광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 열광에 대해 '비판적인' 걱정과 관심을 가지고 인공지능에 대해 알아보았다. 여러 AI 관련 책을 읽었고, 밴드에 그 리뷰도 많이 올렸다. 물론, 그래봤자 일반인 상식 수준의 AI 이해도였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버겁다. 내 동체 시력으로는 AI의 변화와 움직임을 따라잡기가 어렵다. 이제는 그만 AI를 쫓던 눈을 내리 깔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심지어 AI 강의인 이 책도 그 빠른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책의 작가 서문은 2024년 9월에 쓰였다. 그렇다면 본문은 그 전에 쓰여졌다는 얘기일텐데, 중국의 DeepSeek-V3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건 2024년 12월이다. 당연히 딥시크가 불러온 충격과 변화는 담겨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 책이 시대에 뒤쳐진 책일까?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이 책은 AI에 대한 폭넓고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장점은 다양성과 포괄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인간과 민주주의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과 고민을 바탕으로 다양하고 포괄적이면서도 섬세하고 균형잡힌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AI의 원칙을 쫓고 있다.

알파고의 출현 이래 AI에 대한 열광이 나는 늘 불편했다. 수 많은 AI 전문가들이 AI의 기술과 능력과 효용과 미래에 대해서 설명할 때, 인간 삶과 문명에 대한 인문학적인 고민과 성찰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수 많은 인문학자들의 AI가 불러올 인간과 미래의 변화에 대한 전망은 AI 기술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환상으로 보였다. 빅테크 기업들의 과다한 선전과 선동이 휩쓸고 있었다.

이른바 'AI 판사'. 사법 개혁에 대해서도, AI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나는 그 얘기를 들을 때 마다 답답했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에 대한 염원은 나도 똑같이 갖고 있지만, 최소한 현재의 AI는 그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현대 AI의 원리에 대해 조금만 알고 있다면 내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공 지능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AI는 인간이 만든 문물을 학습한 후, 인간의 피드백으로 조정되고 강화된 지능이다. 그래서 AI는 인간의 논리와 지혜 뿐만 아니라 편견과 혐오와 망상까지 가지게 된다. 인공지능은 누가 어떻게 훈련 시키느냐에 따라 히틀러가 될 수도 있고, 스탈린이 될 수도 있고, 간디가 될 수도 있고, 세종대왕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들보다 훨씬 더 똑똑하겠지만.

그래서 이 책의 저자가 하는 말은 큰 울림을 갖는다. '우리는 지금 아마도 산업혁명 이래 가장 큰 인류적 사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모든 사람들에게 AI 리터러시가 아주 긴요합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대응책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아주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AI의 기술적 원리와 AI의 효능 뿐만 아니라 그 위험과 그에 대한 규제와 대책까지 다루고 있다. 사실 나 개인적으로는 '케이트 크로퍼드'의 'AI 지도책'이 AI의 본질에 관해 깊은 고민과 성찰을 담고 있는, AI에 관한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책은 내용이 어렵거나 원리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데 반해, 박태웅의 책은 좀 더 쉽고 현실적인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AI에 관한 기술적인 원리도 쉽게 다루고 있다.


박태웅의 책 2023년 판은 '알라딘'에서 2024년 인공지능 분야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2025 개정증보판은 2023년 판에 비해 두 배로 두꺼워졌다. '지금 AI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어떤 흐름들이 있는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인공지능과 관현한 규제, 위험에 대한 대처, 입법 노력들'에 대한 내용이 대폭 강화되었다.

책의 내용을 최대한 간단히 소개하겠다.

1강. 겉잡을 수 없는 변화의 물결
AI는 다음과 같이 진화하고 있다.
1. 운영 체제로서의 인공 지능 : 모든 소프트웨어가 AI와 연동하게 된다.
2. 맥락 인터페이스 : 정확한 키워드를 입력하지 않아도 인공지능은 맥락을 이해하여 답을 준다.
3. 파트너로서의 인공 지능 : 사용하는 도구가 아닌 일상적인 파트너로서의 기능을 한다.
4. 멀티 모달 : 텍스트 뿐만 아니라 이미지, 음성, 동영상 등 여러 방식의 정보를 처리한다.
5. AI 에이전트 : (인터넷에 연결하지 않고도) 한 대의 PC나 스마트폰에 탑재할 수 있는 AI.
6. 인간형 로봇 : 인공 지능이 '몸'을 가짐으로써 텍스트에 제한되지 않는 물리적 세계 모델을 갖게 된다.

2.강. 모두를 놀라게 만든 거대언어모델, LLM의 등장
챗 GPT는 3천 억 개의 토큰과 5조 개의 문서를 학습했다. 이런 인공 지능을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이라고 부른다. 챗 GPT는 이런 방대한 데이터로 학습한 후 인간의 피드백을 통한 강화학습을 한다(RLHF).

이는 챗 GPT가 개발, 법률, 언론, 주식 등 잠재된 패턴이 있는 분야에서 위력적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챗 GPT는 예측 모델을 사용하기 때문에 '할루시네이션', 즉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는 챗 GPT의 버그가 아니라 특징이다. 또한 챗 GPT는 교묘한 요구를 입력하는 프롬프트 인젝션 공격에 취약하다.

3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똑똑해 질 수 있을까?
고품질의 학습 데이터 사용과 양자화와 지식 증류를 통한 인공 지능 소형화의 흐름이 거세다. PC나 스마트폰 같은 개인용 기기에 탑재되면서 에이전트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4강. 열려버린 파도라의 상자
AI 기술은 인류에게 전례 없는 혜택과 함께 기존 불평등의 심화, 조작 및 허위 정보 유보, 통제력 상실로 인한 인류 멸종 가능성 등 심각한 위험도 가져다 주고 있다.

인간은 AI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간 지능을 뛰어넘을 수 있을 때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유지할 수 있을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기술에 대한 감독은 거의 전무하다.

5강. 신뢰할 수 있는 인공지능, 어떻게 구축할까?
인공지능의 윤리와 관련한 핵심 원칙은 프라이버시, 책임성, 안전과 보안, 투명성과 설명 가능성, 공정성과 차별 금지, 인간의 기술 통제, 직업적 책임, 인간 가치 증진이라는 8가지 주제가 꼽힌다.

2020년 로마 교황청은 인공 지능 윤리를 요청하는 성명을 내 놓는다. 유럽연합은 '5년 간의 토론' 끝에 2024년 인공지능법을 발효시킨다. 미국은 2022년 '알고리즘 책무법안'을 발의한다. (이 리뷰를 쓰면서 검색을 해봤는데, 2025년 5월 29일 현재 법안이 통과되었다는 내용은 찾지 못했다.) 2024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최첨단 인공지능 모델의 안전과 보안에 대한 법안인 SB 1047을 둘러싸고 토론이 벌어졌다.(검색해보니 이 법안은 주의회를 통과했지만, 주지사의 거부권 행사로 결국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선출되지 않은 슈퍼 엘리트들이 거대 인공 지능을 독점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기준으로, 어떤 데이터로, 어떻게 학습을 시키고 있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이들은 인공 지능의 개발 뿐만 아니라 그 사상까지 독점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국가적 규제와 규범의 확립이 대단히 시급하고 중요한 이유다.

6강.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은 2023년 인공지능 법안을 발의했다. (검색해보니 2024년 12월 국회를 통과했고, 2026년 1월 22일부터 시행된다고 한다.) 25쪽에 불과한 법안의 태반은 인공지능 개발 지원에 할당되어 있고 인공 지능의 위험에 대해 다루는 건 적다.

한국 정부의 인공 지능 법안은 '공론화'의 과정이 빠져 있다. 이는 과거 '공인 인증서'처럼 보안을 강화한다면서 보안을 해치는 정책을 떠오르게 한다. 인공 지능 같이 중요한 일을 한 줌도 안되는 IT 분야 슈퍼 엘리트들에게 맡겨둘 수는 없다. 다양한 학제적 연구를 통해 다양한 시민 사회와 이해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처 방안을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 자료들은 아직도 hwp 아니면 pdf 포맷이다. 이는 표준 포맷이 아니어서 컴퓨터가 처리하지 못한다. 컴퓨터에게는 없는 데이터나 마찬가지다. 또한 정부와 사법부의 데이터 공개는 매우 미흡하다. 한국에서 범용 AI가 나오기 어려운 이유다.

세계 최고의 후발 추격국이었던 대한민국은 미친 듯한 속도로 앞선 나라들을 따라 잡고 엄청난 속도로 선진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 빠뜨리고 건너뛴 것이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원천 기술'과 '기초 과학'이다. 원천 기술은 탄탄한 기초 과학에서 나오고, 기초 과학은 아주 긴 호흡으로만 자라난다.

정부의 지원은 유행처럼 주제를 따라가는 방식이 아니라, 연구자를 육성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공무원들은 전문가들과 협업하는 법, 전문가들과 함께 집단 지성을 일궈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부가 과학 기술 정책의 호흡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눈 떠보니 후진국'이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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