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
하버드 철학 리뷰 편집부 엮음, 강유원.최봉실 옮김 / 돌베개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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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이하 ‘하버드’) 1991년부터 1년에 한 번씩 하버드에서 발간되는 <The Harvard Review of Philosophy>의 편집인들이 2002년에 출간한 책이다. 그후로도 두 권의 책을 더 출간했다. 이 저널의 편집인들은 대개가 똑똑하고 야심에 찬 젊은 하버드대 철학과 학부생들이다. 저널이 미국 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학부생들이 위주가 되어 대학의 이름을 걸고 연간지를 낸다니 학생들의 저력을 알 수 있겠다.

<하버드> 1991-2001년간 진행된 ‘철학자’ 14인과의 인터뷰를 엮었다. 각 인터뷰 앞에는 2-5페이지 분량으로 철학에 대해서 간략한 소개가 나온다. 움베르토 에코를 제외한 13인은 모두 미국에 기반을 둔 학자들이며, 그 중 대부분은 하버드에서 가르쳤거나 가르치고 있다. 사실 <The Harvard Review of Philosophy>와 비슷한 이런 류의 저널들은 학교와 학과의 명성(점수)을 높이고, 학생과 교수들에게 좀더 쉽게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전공자들끼리 정보를 공유할 목적이 크다. 근본부터가 대중적인 저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소개된 학자들은 대부분 한국 독자들에게 낯설다. ‘현대’ ‘미국’ ‘철학자’들인 탓이다“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1:46)”는 성경 구절처럼 철학에 관한 한 항상 유럽에 뒤쳐져 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미국에, 그것도 현대 미국에 무슨 철학자가 날 수 있을까? 유럽과 미국은 매우 다른 역사적, 철학적 전통 위에 서 있다. 미 대륙에 발을 디딘 이후 드넓은 광야를 개척해야 했던 미국의 초기 이주자들에게는 골치 아픈 사색보다는 실제 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철학(프래그머티즘)이 가장 절실했다. 예컨대 미국 심리학, 상담학, 정신의학 계통에서는 프로이트나 라깡 같이 문제의 근원을 캐는 이론보다는 치료할 수 있는 영역에 한해서 실제 치료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이론이 인정을 받는다. 그런 쪽에서 일하는 미국 전문가라는 사람들 중에 라깡이라는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 절대 다수이다.

이 책이 한국에 출간된 시점이 절묘하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출간되고 불과 몇 개월 뒤에 이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샌델은 같은 하버드대학의 원로교수 존 롤스의 정의론을 뒤집으면서 유명해졌고, 그의 정의론 강좌는 해마다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책 <하버드>에는 롤스와 샌델의 인터뷰가 모두 실려 있다.

인터뷰 형식이기 때문에 학자들의 이론을 깊이 있게 분석해서 제공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신변잡기적인 것도 아니다. 편집인들은 인터뷰 형식을 통해 책 내용을 더 쉽게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미국 학자들에 낯선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짧고 간단한 인터뷰 형식이 그 학자에 대한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인터뷰어가 질문에서 낯선 개념이나 용어들을 툭툭 던지기 때문에, 해당 학자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독자는 인터뷰에서 소외감마저 느낄 수 있다. 용어에 대한 주석이 좀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인터뷰 앞에 2-3페이지 정도 분량으로 학자를 소개하지만, 이 또한 너무 간략해서 큰 도움은 안 된다. 학부생으로 구성된 인터뷰어들에게는 미국 내에서 이름 있는 학자들을 만났다는 게 자부심이 되겠지만, 이 책은 그 이상은 없다.

<하버드>를 한국에서 번역해서 출간한 것은 대단한 모험으로 보인다. 하버드대학의 이름값 덕을 보기 위해서인지 한글 제목에 ‘하버드’가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기꺼이 읽어 볼 한국 독자층이 극히 얇아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라면 하버드 동문들도 많이 있을 테고, 하다 못해 일반인 중에서도 언론에서 몇 번 들어본 학자들이 등장하니까 약간의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일단 장르가 철학이라는 비대중적인 장르인데다가, 등장하는 학자들이 낯선 미국의 당대 학자들이다.

더욱이 번역이 썩 훌륭하지 않은 탓에 본문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커진다. 원서 자체가 하버드 철학과에서 쓰이는 전문어(jargon)와 딱딱한 말투로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번역문이 매우 딱딱하고 종종 부자연스럽다. 영문과 병기된 소제목을 보면 오역도 눈에 많이 띈다. 예컨대 Philosophical Faith in Action(p. 49)은 ‘in action’이 ‘행동 중에 있는’이라는 뜻이므로 ‘행동하는 철학() 신념’ 정도로 번역해야 하는데 ‘행위에 대한 철학적 신념’이라고 오역했다. 그리고 Reflection on a Life of Philosophy(p.75)는 ‘철학의 삶(철학적인 삶, 철학하는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 해야 하는데, ‘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라고 어색하게 번역했다. Perspectives on Logic, Science, and Philosophy(p. 279)에서 ‘perspectives’는 ‘전망’보다는 ‘견해’라고 번역하는 게 나을 듯하다. What time is it on the sun?(p.303)은 지구에서는 태양을 기준으로 시각을 측정하지만 과연 태양에서는 어떻게 시각을 측정할 것인가 하는 질문(생각과 관점의 한계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전제)이므로 ‘태양은 지금 몇 시인가?’라고 그대로 번역해야 하는데 ‘해는 몇 시에 뜨는가?’라고 오역했다. 이 책에 실린 많은 철학자들이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비트겐슈타인의 핵심질문을 이처럼 오역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P.134의 ‘방문학자’는 visiting scholar를 번역한 듯한데, 대개 ‘방문교수’라고 번역한다. Peter Unger의 성 Unger  ‘웅어’가 아니라 ‘언거’라고 발음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번역상의 문제가 역자들의 단어 선택의 취향이나 사소한 오류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문장 하나를 예로 들어 보자.

“그는 사람들이 이러한 입장에서 한두 가지 평균적으로 낮은 수준의 희생이 있더라도 자유와 부라는, 기회와 권력에서는 최소극대화되는 위험성이 낮은 전략을 선택할 것이라 주장한다. (p. 135)

이 문장을 보면 구조상 ‘자유와 부’는 곧 ‘전략’을 가리켜야 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이 둘은 동일할 수는 없으므로 ‘자유와 부를 선택하는 것’이 ‘전략’이 되어야 옳다. 뭔가 오역이다 싶어서 어렵사리 원문을 찾아 봤다.

He argues that in this position people would choose a low-risk strategy in which liberties and the highest minimum levels of wealth, opportunity, and power are promoted even at the expense of lowering average levels of one or another.

완전한 오역이다. 이 문장 말미에서‘one’은 ‘wealth, opportunity, and power’ 중 어느 하나, another’는 그것을 제외한 다른 하나를 가리킨다. 이 점을 고려하는 한편 다른 오역을 수정해서 다시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사람들이 이러한 입장에 처했을 때 부, 기회, 권력 중 어느 하나의 평균 수준을 낮추더라도 그 최저한도 상한선과 자유를 향상시키는 저위험 전략을 선택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one’이 ‘liberties’를, another’는 ‘the highest minimum levels’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이 둘 중 하나를 희생하더라도 두 가지(의 합)를 증진시키는 쪽을 택하리라는 주장이다. 이 경우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면 된다.

“그는 사람들이 이러한 입장에 처했을 때 부, 기회, 권력의 자유와 그 최저한도 상한선 중에서 어느 한 쪽의 평균 수준을 낮추는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이 두 가지를 향상시키는 저위험 전략을 선택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돌베개는 내가 학부 때부터 호감을 가졌던 출판사인데, 이번 책은 다소 실망스럽다. 이 책이 어떤 독자들을 예상하고, 어떤 계기로 한국에서 출판됐는지 모르겠고, 어떻게 해서 미국철학 전공자도 아니고 영문학 전공자도 아닌 역자들이 책을 번역하게 됐을까도 의문이고출판사에서 좀더 꼼꼼한 교정을 통해 오타, 오역, 잘못된 문장을 잡아내지 못한 점도 아쉽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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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세계사 - 우리가 해결해야 할 전 지구적 이슈와 쟁점들 르몽드 세계사 1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지음, 권지현 옮김 / 휴머니스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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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세계사>는 <Le Monde Diplomatique>를 번역한 책이다. <르몽드 세계사>라는 한글 제목 때문에 세계역사를 다룬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 책은 통시적으로 세계역사를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전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비록 과거의 통계자료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재와 비교하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맥락에서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한국어 제목은 World History가 아닌 World Affair의 의미를 지닌 ‘世界事’라고 보면 될 것이다.

책 서문은 지도의 정확성에 대한 과유불급의 교훈을 주는 보르헤스의 소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더 정교한 지도를 만들다가 결국 지도가 제국만큼이나 커져버렸다는 넌센스를 통해, 현상을 더 잘 관찰할 수 있는 적절한 지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왜 지도 이야기로 시작했을까? 다름이 아니라 이 책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 수많은 지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통계를 글로 서술하거나 표로 제시하는 대신에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각 국가 위에 다양한 길이의 막대기와 크고 작은 원, 색상 차이 등을 통해 통계를 ‘보여준다’. 여러 가지 다양한 통계가 하나의 커다란 세계지도 안에 다양한 시각적 효과로 구현된 것을 보노라면 지도 제작자의 번득이는 아이디어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러한 방식이 독자에게 주는 효과는 분명해 보인다. 독자들은 우선 통계를 지루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고, 나아가 전세계를 한눈에 고려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브라질은 이렇고, 벨로루시는 저렇다는 것을 말이나 수치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지도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전세계를 한눈에 품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지구적 이슈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더욱 실감할 수 있게 된다가령 아프리카 적도 주변에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띠 모양 바로 밑으로 벌채가 활발한 띠 모양의 지역을 보면서, 독자는 벌채가 끼칠 사막화에 대해 경각심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이런 효과만이 이 책이 가진 장점의 전부는 아니다. 르몽드가 엄선한 104개의 주제에 대해 76명의 뛰어난 집필진이 글을 썼다. 1인당 1-2편의 글을 쓴 셈이다. 집필진 중에는 촘스키, 데리다, 홉스봄도 있다 하니 반갑다. 수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만큼, 지금 이 순간 지구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몰랐던 문제들까지 깨달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륙간 건강불평등을 다룬 챕터를 보면 막연하게 생각하던 건강불평등의 실상이 얼마나 처참하고 처연한지 느낄 수 있다. 특히 아프리카 내륙 국가들은 평균수명이 30-40세에 불과한데,  이곳 출신 의사들이 에이즈, 저임금, 정치적 탄압을 피해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대거 타국으로 빠져나가버리는 탓에 양질의 질병 치료의 기회는 매우 부족하다. 선진국에서 에이즈 치료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중이지만, 그 혜택이 아프리카 국민들에게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연구는 활발해진 인구 이동 유출입 과정에서 아프리카를 빠져나온 에이즈균에 감염된 부유한 소수의 선진국 국민을 위한 것이지 국가 전체가 죽어가는 아프리카 국민들을 위한 것은 아닐 터이다.

주제가 다양한 만큼 아쉬운 점도 있다. 모든 챕터가 2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는데다가 각 챕터마다 지도가 몇 개씩 들어가기 때문에 챕터별 내용은 사실 매우 짧다. 그 짧은 공간 안에 많은 이야기를 담다 보니 어떨 때는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 용어, 사건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지나가기도 한다.

그리고 지도에 간혹 오기나 잘못된 정렬이 눈에 띈다. 교정을 할 때 지도와 표는 본문보다 신경을 덜 쓴 듯하다.

이 책은 오늘날 세계의 쟁점을 확인하기에 적합한 다양성과 적당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 요즘 사회운동 진영에서 흔히 쓰는 문구 중에 “Think Globally, Act Locally. “가 있는데이 책을 읽게 된다면 일단 “Think Globally”는 이룰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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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ca Alone: The End of the World as We Know It (Hardcover)
Mark Steyn / Regnery Pub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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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uthor advocates politically incorrect measures regarding, in particular, concessions to Islam in the name of multiculturalism. When a terrorist explodes a skyscraper in your capital city, for example, the first reaction of your politicians is to visit one of the biggest mosques in the city and affirm that they don’t think the terror is related to Islam. Politicians in the western societies appear to be under an obsession they should not incite perverseness among Islamists. The author also warns of “womanization” of western politics, psychologically and even physically.

This has been exacerbated by ever lower fertility rates among western societies. As combined with much higher fertility rates among Islam populations, these demographic tendencies are having Western Europe supplanted by Islam populations. Western societies, who hardly checked Islam’s advancement in the 8th century, are now willing to hand over their strongholds.

This is one of the conservative standpoints about multiculturalism. The author is very tough and frankly admits he is a Republican. At the end of the book, he offers some suggestions to reverse current situations, to which I never want to agree. He, as a citizen of the West, may have felt obliged to save the western world being threatened by Islam. To Koreans the Islamist threats are not as severe as in the western societies. As the irreversible globalization develops much more, however, lots of Koreans might agree to the author’s cultural “conserva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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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라는 유령 -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론 비판 이매진 컨텍스트 14
알렉스 캘리니코스 외 지음, 고팔 발라크리슈난 엮음, 김정한 옮김 / 이매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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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 Alex Calinicos,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i] 등 많은 학자들이 최근 세계경제의 위기와 관련하여 자본주의의 꾸준한 이윤율 하락을 근본 원인으로 지적했다. 실물 경제의 팽창이 한계에 다다르면 이윤율 하락이 불가피하다. 1970년대에 세계경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 세기 전 다른 자본주의 경제가 그러했듯이 금융적 팽창으로 전환했다. 레닌은 금융 자본주의를 자본주의 최고, 최후의 단계로 규정했는데, 실물적 팽창에서 금융적 팽창으로의 이행은 이미 그 자체로 자본의 위기를 보여준다. 닷컴 기업을 과대포장해 주식시장을 활성화시키려던 시도도, 주택을 담보로 끝없는 파생상품을 내놓 아 금융시장을 부풀리려던 시도도 모두 자본의 위기를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는 위험한 미봉책이다. 금융시장 쪽에 정보를 쥐락펴락 하는 최상위 계층들만이 이번 일련의 사태들을 통해서 한 건했을 뿐이다.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세계경제의 헤게모니국가 미국은 이제 중국이 구매해준 대량의 국채 덕에 근근이 빚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으며,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가치가 위태해지면서 세계 경제도 휘청이고 있다. 미국의 경제 위기는 곧 유럽을 비롯한 전세계 경제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많은 학자들이 경고하듯이 자본주의가 망하고 새로운 형태의 경제 체제가 머지 않아 들어설 것 같다.

그런데 새로운 체제는 누가 주도하고 어떤 형태를 띨 것인가? 세계체제론자 아리기는 <장기 20세기 The Long Twentieth Century>에서 장차 어느 지역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헤게모니를 쥘 것이가와 관련하여 몇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세계체제론자들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에도 여전히 자본주의의 위기와 이행에 대해서 꽤나 설득력 있는 논거를 제시해 왔다. 볼셰비키적 조직운동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과 일국 사회주의는 탄생 때부터 이미 몰락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일 체제화된 전지구적 세계 경제는 맑스의 예견대로 일시에 다른 형태에 이행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 그렇지만 구조(경제)에 대한 지나친 강조 탓에 세계체제론은 체제 이행과 관련하여 대기론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자본주의 체제는 저절로(?) 다른 체제로 이행하는가?

하트와 네그리는 어떤 의미에서 세계체제론자들과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다. 아리기 등 세계체제론자들이 제시한 시나리오가 역사주의적, 구조 중심적이라면, 하트와 네그리가 <제국>에서 제시하는 시나리오는 주체 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2000<제국>을 출간했을 때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새로운 공산당 선언으로 환영했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적 지구화가 무자비하게 진전됨에 따라 좌파들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제국>은 강력한 해독제역할을 했다. 하트와 네그리는 지구화를 자본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라 저주받은 자들의 욕망이 실현될 것을 약속하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보았다. 제국속에서는 본질적으로 권력의 주체화와 생산의 가상화가 네트워크 사회의 리좀을 통해 예측 불가능하게 연결되고, 거대한 잠재력을 지닌 새로운 종류의 내재적 저항의 기회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제국’(항상 단수이며, 관사 없이 쓰이는 Empire)실질적인 저항이나 갈등 없이 주체성들이 가로질러 미끄러져 가는 일종의 매끄러운 공간이라고 정의한다. 지구적 영역 전체를 통합하는 탈중심화되고 탈영토화된 이 지배 장치 속에서는 어떤 주체성도 외부에 있지 않으며” “시민사회는 국가에 흡수되지만, 그 결과 이전에는 시민사회에서 조정되고 매개되던 요소들이 폭발한다. …저항은 더 이상 주변적이지 않으며 네트워크 속에서 열리는 사회의 중심에서 활동한다.” 즉 제국은 타자를 갖지 않는다. 현존하는 생산과 통치 체제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되돌릴 수 없는 지구화의 확산에 관해서 우선 하트와 네그리도 우파적 시각을 공유한다. 그러나 주체의 각성에 관한 한 이들의 입장은 확연히 갈린다. 하트와 네그리는 노동운동 세력을 자본의 경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의 생산과 통제 네트워크들이 지구화되면서 곧 반란의 각 지점이 모두 강화된다. 지도자, 노동조합, 정당 같은 다양한 수준들 사이의 수평적 절합은 더 이상 필요 없으며, 다중(multitude)단지 그들 자신의 역량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에너지를 팽팽하고 촘촘하게 감긴 코일에 집중함으로써투쟁들은 제국적 질서의 최고의 절합점들을 직접 타격한다.”

<
제국이라는 유령> UC 산타크루즈 교수 고팔 발라크리슈난Gopal Balakrishnan2003년에 엮은 <Debating Empire>를 번역한 책이다.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에 대해 찰스 틸리Charles Tilly,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inicos 등이 정치, 경제, 철학 등 여러 측면에서 비판한 11편의 논문을 묶었다.

출판사와 역자들이 <Debating Empire>의 한글 제목을 <제국이라는 유령>이라고 붙인 것은 아마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유령—“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을 염두에 둔 듯하다. 그러나 두 유령에 담긴 뉘앙스는 사뭇 다르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인들을 놀라게 할 무서운 유령이라는 의미가 강했다면, “제국이라는 유령은 허상에 불과한 맥빠진 유령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제국이라는 유령>에 실린 논문들은 하나 같이 하트와 네그리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다.

몇몇 논문들을 살펴보자. 마이클 러스틴은 우선 <제국>의 철학적, 정치적 배경을 고찰하고 나서, 이 책이 좀더 평화로운 시기였던 1990년대 중후반에 쓰여진 탓에 하트와 네그리가 다중의 각성과 봉기가 제국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지나친 낙관주의로 나아갔다고 비판한다. 러스틴이 보기에 <제국>의 낙관론은 전혀 근거가 없다. 특히 위에서 가하는 교묘한 조작에 이전보다 더 취약한 원자화된 대중 사회를 창출할수 있다는 러스틴의 비관적인 주장에 대해서 하트와 네그리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찰스 틸리는 흐릿한 자줏빛 바다 위에 소용돌이치는 백색 구름과 그 너머의 허공을 찍은 <제국>의 표지 사진을 언급하면서 이것이 하트와 네그리의 공허한 주장을 닮았다고 지적한다. 그는 하트와 네그리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사회적 과정들에 대한 별다른 구체적인 예시도 없이, 자의적으로 정의한 용어들로 자신들의 주장을 추상적으로 내던진다고 비판한다.

조반니 아리기의 비판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는 하트와 네그리가 대부분 은유와 이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경험적 증거를 체계적으로 회피한다고 비판한다. 하트와 네그리가 다중의 역량 강화 프로그램의 기본 요소로 내세우는 것들 중 사회적 임금과 모든 개인들을 위한 보장된 소득이라는 것도 통계적 사실과 맞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하트와 네그리가 유럽-미국의 계보에만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며, 그것이 아시아적 계보들과 잡종화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엘린 메익신즈 우드는 한발 더 나아가 <제국>의 주장이 우파의 자본주의 선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한다. 우드가 보기에 <제국>의 주장은 오래된 다원주의정치학의 논변을 전지구적으로 좀더 넓게 확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트와 네그리가 봉기의 가능성과 다중의 힘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제국>의 논조는 저항을 옹호하기보다는 저항의 무익함을 옹호하는 데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 우드의 생각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비물질적 저항을 통해 대항하는 신비한 힘을 가질 뿐이다.” 나아가 우드는 하트와 네그리의 생각과 달리 지구화가 민족국가의 능력을 쇠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민족국가의 힘을 전제한다고 지적한다. 이외에도 우드는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하는 제국의 평등주의적, 평화주의적 속성에 대해서도 반박한다.

티모시 브레넌은 하트와 네그리가 역사를 바라보고 역사적 맥락에서 개념을 추출하는 아상블라주(assemblage; 들뢰즈와 가타리가 과학에 반대해 선택한 방법론적 절충주의)에 문제를 제기한다. 브레넌은 “<제국>새로운 배열은 그 본래의 체계에서 떼어낸 무의미한 철학적 도구에 불과하다며 어떤 체계에서 처음으로 정식화된 관념들을 맥락적 공명을 가정하지 않은 상태로 빌려온하트와 네그리의 천박한 실용주의를 비판한다. 엮은이 발라크리슈난 또한 하트와 네그리의 아상블라주가 겉보기는 화려하지만 지적으로는 허약한 꽃다발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캘리니코스의 논조는 그나마 가장 우호적이다. 그는 <제국>이 출간되기 훨씬 이전 시기부터 네그리의 삶과 사상의 발전을 다룬다. 68혁명 즈음 네그리가 가담한 자율주의 무장테러 운동을 살펴보고, 그후 네그리의 사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추적한다. 투쟁이 한창이던 1970년대 말에 진행된 세미나에 기초한 <맑스를 넘어선 맑스>에서 네그리는 역사 변동의 추동력에 관한 포괄적인 이론인 맑스주의를 권력 이론으로 협소화하면서 자신의 맑스주의 버전을 포스트구조주의와 연결시켰다. 여기서 네그리는 질적으로 새로운 구조를 창조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투쟁 능력구성의 원리를 강조했다. 이후 네그리는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의 주체론에 기대어 다중의 저항 가능성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캘리니코스는 최근의 시위를 언급하면서 오직 조직화된 노동계급의 대중 동원만이 자본주의 국가의 집중화된 권력에 맞설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율주의자들은 자신과 자본주의 국가의 대결을 낭만화하면서 혁명 정치의 현실적 과제다수 노동계급의 정치적 획득를 회피한다.” 역설적으로 네그리의 영향력이 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의 성공에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은 자본의 완승처럼 보이는 지구화의 물결을 바라보며 실의에 빠진 좌파에게 구원과도 같은 책이었다. 적어도 9.11 이전까지는 그랬다. 세계체제론자들의 대기론적 입장과 달리 <제국>다중이라는 주체의 봉기 가능성을 매우 높이 평가함으로써 가장 평온해 보이는 제국의 전성기에도 변혁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제국>은 인식론적, 철학적,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많은 모호함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 ‘매끄러운 공간으로서 제국에 대한 전제나 다중의 역량에 대한 찬양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추상적이며, 논거가 부족하다. 더욱이 9.11 이후 군사, 정치, 경제적으로 제국에 균열이 생기면서 <제국>의 현실 적합성에 더욱 의문이 제기되었다. 하트와 네그리가 찬양한 미국식 민주주의는 통제 속에 갇혀 버렸고 다중은 가상의 미국이 아닌 현존하는 미국과 대면해야 했다.

<제국이라는 유령>에 실린 11편의 논문을 통해 <제국>에 관한 고차원적인 비판들을 접할 수 있다. 이 한 권으로 족하다. <제국>을 읽은 독자에게도, 혹은 읽지 않은 독자에게도 <제국이라는 유령>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을 통해 <제국>의 쟁점과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비록 이 책의 저자들이 <제국>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두 입장 간의 절충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지구화에 대한 평가야 어찌 되었건 하트와 네그리, 그리고 <제국이라는 유령>11명의 저자들 모두 반자본주의라는 공통된 깃발 아래 있다면, 상대방의 결함을 지적하고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서로의 장점을 취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논거 없는 주장은 무익하며 실천 없는 선언은 공허하다. 저자들이 비판해 마지 않는 아상블라주식 짜깁기가 아니라 현실에 기반하고 실천을 전제로 하는 이론이라면, ‘유령은 허상이 아닌 실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i] <무너지는 환상 Bonfire of Illusions, 2010>, <장기 20세기 The Long Twentieth Century, 1994>,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First As Tragedy, Then As Far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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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택광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저자는 기존의 좌우 정치 지형에 속하지 않는 다른 주체로서 인문좌파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인문좌파는 좌우 이념을 모두 회의하는 독특한 사유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는 합의에 도전하고 불일치와 불통을 조장하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유의 모험으로서의 이론관에 부합하는 존재이다. 현실의 중력에 저항하기 위해 인문좌파는 이론이라는 근육을 키워야 한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고 잃을 것이 조금씩 더 많아짐에 따라 대개 보수화되기 마련이지만, 사유의 자유를 통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도전하는 인문좌파는 계속해서 좌파로 남을 수 있고 남아야 한다는 것이 아마 저자의 생각인 것 같다. 그렇다면 최신 사조에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인문좌파의 숙명일 터이다. 이택광은 그러한 인문좌파에게 지금 필요한 이론으로서 포스트 구조주의의 안티테제들을 소개한다. 논의의 시작은 마르크스이다. 근대 사회의 욕망은 자본주의적 상품 교환에 그 기본형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 덕에 대중화된 라캉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와 정신분석학의 결합은 더욱 공고해지며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은 정치철학의 위치를 되찾는다.

그런데 저자의 이론근육론(?)이 무색하게, (얇은) 책 한 권을 읽어서 10여 명의 이론가 혹은 경향들에 대한 이론근육을 제대로 형성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물론 책을 통해 해당 이론가에 대한 지적 호기심은 자극될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이 있는 것을 애써 찾아 읽어보려는 의사가 없는 독자에게는 변죽만 울린 셈이다. 핵심근육(을 위한 기초)은 이 책으로 어느 정도 형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잔근육은 결국 독자의 몫이다. 잔근육까지 형성된 후에라야 이론은 온전한 근육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런 류의 책이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이다. 어려운 글을 쉽게, 그것도 방대한 분량을 짧게 한 권의 책 속에 담으면서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한계 말이다. 객관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는 잡기 어렵다.

이 책은 성격상 뭔가 좀 애매한 책이다. 에세이보다는 무겁고 이론서보다는 가볍다. 저자는 대중성을 다분히 의식하고 쉽게 쓰려고 했고 군데군데 주관적인 주장도 하지만, 때로는 주석을 달아 객관적인 글쓰기의 외양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책이 무거워 보이지 않도록 주석을 최소화하고 미주로 돌려서 구성을 심플하게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글의 출처가 불확실하다. 예컨대 어떤 챕터는 100% 저자의 주관적인 글이 아닌 게 분명한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주석도 없고 출처도 전혀 나와 있지 않은데, 내용을 Wikipedia에서 긁어온 것이 아니라면 주석을 달아주는 게 좋았을 것이다.

 가이드를 통해 인문좌파의 세를 넓히고자 했다면 좀더 쉽게 썼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 책에서는 이론과 전문용어들이 별다른 설명 없이 쓰일 때가 많고 현학적인 학술 은어도 종종 여과 없이 쓰인다. 아마 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부생(1학년 제외)들이나 최신 유럽철학에 관심과 지식을 꽤 쌓은 소수의 인문학도들에게 가장 유용한 책일 것이다. 때문에 가이드로는 큰 점수를 줄 수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일정한 기획 의도 하에 마르크스로부터 시작해서 최신 이론들을 정리한 저자의 노고는 충분히 높이 살 만하다.

이 책은 1990년대 중후반 대학가에서 널리 읽혔던 『철학과 굴뚝청소부』(이하 철굴’) 를 연상시키는데, 그 책과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철굴>은 근대와 탈근대의 철학에서부터 구조주의 및 포스트 구조주의 철학까지 살피는 반면, <인문좌파>포스트구조주의라 불렸던 이론들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경향들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다.” <철굴>은 글의 어투(구어체)라든가 삽화의 조악함에서부터 이미 이 책은 가벼운 책입니다.”라고 웅변하고 있지만, <인문좌파>는 가볍게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거워 보인다. <철굴>은 과잉단수화를 의도적으로 활용하여 과감하게 객관성을 버리고(?) 저자의 시각으로 이론을 단순화시켜서 독자의 이해를 높이지만, <인문좌파>는 객관성의 외양을 (어정쩡하게) 유지하려다보니 글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가 이론에 대한 객관적 설명이고 어디서부터가 저자의 주관적 생각인지 불분명하다. 굳이 좀더 비교를 더 해보자면, <철굴>은 근대와 탈근대라는 일관된 주제 하에 이론들을 어느 정도 직렬적으로 배치했지만, <인문좌파>는 이론들의 배치가 병렬적이다. 특히 7장 지젝 이후는 더욱 그렇다. ‘과잉단순화전략과는 거리가 먼 저자의 입장 때문이기도 하고 일관된 타이틀 아래 담기 어려운 현대 철학의 다양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현재적, 잠재적 인문좌파를 타깃으로 삼아 그들을 가이드해주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인문좌파임을 자처하는 이들을 가이드하기에 이 책은 지나치게 쉽고, 잠재적 인문좌파로서 이 책을 통해 현재적 인문좌파가 되어야 할 이들을 가이드하기에는 다소 어렵다는 점에서 그 입지가 애매한 책이 되고 말았다. 마치 현대 우리 사회에서 인문좌파의 실체가 아직은 애매모호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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