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캘리니코스 Alex Calinicos,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i] 등 많은 학자들이 최근 세계경제의 위기와 관련하여 자본주의의 꾸준한 이윤율 하락을 근본 원인으로 지적했다. 실물 경제의 팽창이 한계에 다다르면 이윤율 하락이 불가피하다. 1970년대에 세계경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 세기 전 다른 자본주의 경제가 그러했듯이 금융적 팽창으로 전환했다. 레닌은 금융 자본주의를 자본주의 최고, 최후의 단계로 규정했는데, 실물적 팽창에서 금융적 팽창으로의 이행은 이미 그 자체로 자본의 위기를 보여준다. 닷컴 기업을 과대포장해 주식시장을 활성화시키려던 시도도, 주택을 담보로 끝없는 파생상품을 내놓 아 금융시장을 부풀리려던 시도도 모두 자본의 위기를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는 위험한 미봉책이다. 금융시장 쪽에 정보를 쥐락펴락 하는 최상위 계층들만이 이번 일련의 사태들을 통해서 ‘한 건’ 했을 뿐이다.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세계경제의 헤게모니국가 미국은 이제 중국이 구매해준 대량의 국채 덕에 근근이 빚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으며,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가치가 위태해지면서 세계 경제도 휘청이고 있다. 미국의 경제 위기는 곧 유럽을 비롯한 전세계 경제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많은 학자들이 경고하듯이 자본주의가 망하고 새로운 형태의 경제 체제가 머지 않아 들어설 것 같다.
그런데 새로운 체제는 누가 주도하고 어떤 형태를 띨 것인가? 세계체제론자 아리기는 <장기 20세기 The Long Twentieth Century>에서 장차 어느 지역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헤게모니를 쥘 것이가와 관련하여 몇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세계체제론자들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에도 여전히 자본주의의 위기와 이행에 대해서 꽤나 설득력 있는 논거를 제시해 왔다. 볼셰비키적 조직운동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과 일국 사회주의는 탄생 때부터 이미 몰락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일 체제화된 전지구적 세계 경제는 맑스의 예견대로 일시에 다른 형태에 이행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 그렇지만 구조(경제)에 대한 지나친 강조 탓에 세계체제론은 체제 이행과 관련하여 ‘대기론’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자본주의 체제는 저절로(?) 다른 체제로 이행하는가?
하트와 네그리는 어떤 의미에서 세계체제론자들과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다. 아리기 등 세계체제론자들이 제시한 시나리오가 역사주의적, 구조 중심적이라면, 하트와 네그리가 <제국>에서 제시하는 시나리오는 주체 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와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가 2000년 <제국>을 출간했을 때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새로운 ‘공산당 선언’으로 환영했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적 지구화가 무자비하게 진전됨에 따라 좌파들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제국>은 강력한 ‘해독제’ 역할을 했다. 하트와 네그리는 지구화를 자본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라 저주받은 자들의 욕망이 실현될 것을 약속하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보았다. 즉 ‘제국’ 속에서는 “본질적으로 권력의 주체화와 생산의 가상화가 네트워크 사회의 ‘리좀’을 통해 예측 불가능하게 연결되고, 거대한 잠재력을 지닌 새로운 종류의 내재적 저항의 기회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제국’(항상 단수이며, 관사 없이 쓰이는 Empire)이 “실질적인 저항이나 갈등 없이 주체성들이 가로질러 미끄러져 가는 일종의 매끄러운 공간”이라고 정의한다. 지구적 영역 전체를 통합하는 탈중심화되고 탈영토화된 이 지배 장치 속에서는 “어떤 주체성도 외부에 있지 않으며” “시민사회는 국가에 흡수되지만, 그 결과 이전에는 시민사회에서 조정되고 매개되던 요소들이 폭발한다. …저항은 더 이상 주변적이지 않으며 네트워크 속에서 열리는 사회의 중심에서 활동한다.” 즉 제국은 ‘타자’를 갖지 않는다. 현존하는 생산과 통치 체제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되돌릴 수 없는 지구화의 확산에 관해서 우선 하트와 네그리도 우파적 시각을 공유한다. 그러나 주체의 각성에 관한 한 이들의 입장은 확연히 갈린다. 하트와 네그리는 노동운동 세력을 자본의 경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의 생산과 통제 네트워크들이 지구화되면서 곧 반란의 각 지점이 모두 강화된다. 지도자, 노동조합, 정당 같은 다양한 수준들 사이의 ‘수평적 절합’은 더 이상 필요 없으며, 다중(multitude)은 “단지 그들 자신의 역량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에너지를 팽팽하고 촘촘하게 감긴 코일에 집중함으로써… 투쟁들은 제국적 질서의 최고의 절합점들을 직접 타격한다.”

<제국이라는 유령>은 UC 산타크루즈 교수 고팔 발라크리슈난Gopal Balakrishnan이 2003년에 엮은 <Debating Empire>를 번역한 책이다.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에 대해 찰스 틸리Charles Tilly,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inicos 등이 정치, 경제, 철학 등 여러 측면에서 비판한 11편의 논문을 묶었다.
출판사와 역자들이 <Debating Empire>의 한글 제목을 <제국이라는 유령>이라고 붙인 것은 아마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유령—“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을 염두에 둔 듯하다. 그러나 두 유령에 담긴 뉘앙스는 사뭇 다르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인들을 놀라게 할 무서운 유령이라는 의미가 강했다면, “제국이라는 유령”은 허상에 불과한 맥빠진 유령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제국이라는 유령>에 실린 논문들은 하나 같이 하트와 네그리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다.
몇몇 논문들을 살펴보자. 마이클 러스틴은 우선 <제국>의 철학적, 정치적 배경을 고찰하고 나서, 이 책이 좀더 평화로운 시기였던 1990년대 중후반에 쓰여진 탓에 하트와 네그리가 다중의 각성과 봉기가 제국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지나친 낙관주의로 나아갔다고 비판한다. 러스틴이 보기에 <제국>의 낙관론은 전혀 근거가 없다. 특히 “위에서 가하는 교묘한 조작에 이전보다 더 취약한 원자화된 ‘대중 사회’를 창출할” 수 있다는 러스틴의 비관적인 주장에 대해서 하트와 네그리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찰스 틸리는 흐릿한 자줏빛 바다 위에 소용돌이치는 백색 구름과 그 너머의 허공을 찍은 <제국>의 표지 사진을 언급하면서 이것이 하트와 네그리의 공허한 주장을 닮았다고 지적한다. 그는 하트와 네그리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사회적 과정들에 대한 별다른 구체적인 예시도 없이, 자의적으로 정의한 용어들로 자신들의 주장을 추상적으로 내던진다”고 비판한다.
조반니 아리기의 비판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는 하트와 네그리가 “대부분 은유와 이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경험적 증거를 체계적으로 회피”한다고 비판한다. 하트와 네그리가 다중의 역량 강화 프로그램의 기본 요소로 내세우는 것들 중 ‘사회적 임금과 모든 개인들을 위한 보장된 소득’이라는 것도 통계적 사실과 맞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하트와 네그리가 유럽-미국의 계보에만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며, 그것이 아시아적 계보들과 잡종화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엘린 메익신즈 우드는 한발 더 나아가 <제국>의 주장이 우파의 ‘자본주의 선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한다. 우드가 보기에 <제국>의 주장은 오래된 ‘다원주의’ 정치학의 논변을 전지구적으로 좀더 넓게 확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트와 네그리가 봉기의 가능성과 ‘다중’의 힘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제국>의 논조는 저항을 옹호하기보다는 저항의 무익함을 옹호하는 데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 우드의 생각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비물질적 저항을 통해 대항하는 신비한 힘을 가질 뿐이다.” 나아가 우드는 하트와 네그리의 생각과 달리 지구화가 민족국가의 능력을 쇠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민족국가의 힘을 전제한다고 지적한다. 이외에도 우드는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하는 제국의 평등주의적, 평화주의적 속성에 대해서도 반박한다.
티모시 브레넌은 하트와 네그리가 역사를 바라보고 역사적 맥락에서 개념을 추출하는 아상블라주(assemblage; 들뢰즈와 가타리가 과학에 반대해 선택한 방법론적 절충주의)에 문제를 제기한다. 브레넌은 “<제국>의 ‘새로운 배열’은 그 본래의 체계에서 떼어낸 무의미한 철학적 도구에 불과”하다며 “어떤 체계에서 처음으로 정식화된 관념들을 맥락적 공명을 가정하지 않은 상태로 빌려온” 하트와 네그리의 ‘천박한 실용주의’를 비판한다. 엮은이 발라크리슈난 또한 하트와 네그리의 아상블라주가 “겉보기는 화려하지만 지적으로는 허약한 꽃다발”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캘리니코스의 논조는 그나마 가장 우호적이다. 그는 <제국>이 출간되기 훨씬 이전 시기부터 네그리의 삶과 사상의 발전을 다룬다. 68혁명 즈음 네그리가 가담한 자율주의 무장테러 운동을 살펴보고, 그후 네그리의 사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추적한다. 투쟁이 한창이던 1970년대 말에 진행된 세미나에 기초한 <맑스를 넘어선 맑스>에서 네그리는 “역사 변동의 추동력에 관한 포괄적인 이론인 맑스주의를 권력 이론으로 협소화”하면서 자신의 맑스주의 버전을 포스트구조주의와 연결시켰다. 여기서 네그리는 “질적으로 새로운 구조를 창조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투쟁 능력”인 ‘구성의 원리’를 강조했다. 이후 네그리는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의 주체론에 기대어 ‘다중’의 저항 가능성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캘리니코스는 최근의 시위를 언급하면서 “오직 조직화된 노동계급의 대중 동원만이 자본주의 국가의 집중화된 권력에 맞설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율주의자들은 자신과 자본주의 국가의 대결을 낭만화하면서 혁명 정치의 현실적 과제—다수 노동계급의 정치적 획득—를 회피한다.” 역설적으로 네그리의 영향력이 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의 성공에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은 자본의 완승처럼 보이는 지구화의 물결을 바라보며 실의에 빠진 좌파에게 구원과도 같은 책이었다. 적어도 9.11 이전까지는 그랬다. 세계체제론자들의 ‘대기론’적 입장과 달리 <제국>은 ‘다중’이라는 주체의 봉기 가능성을 매우 높이 평가함으로써 가장 평온해 보이는 ‘제국’의 전성기에도 변혁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제국>은 인식론적, 철학적,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많은 모호함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 ‘매끄러운 공간’으로서 제국에 대한 전제나 ‘다중’의 역량에 대한 찬양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추상적이며, 논거가 부족하다. 더욱이 9.11 이후 군사, 정치, 경제적으로 제국에 균열이 생기면서 <제국>의 현실 적합성에 더욱 의문이 제기되었다. 하트와 네그리가 찬양한 미국식 민주주의는 통제 속에 갇혀 버렸고 다중은 가상의 미국이 아닌 현존하는 미국과 대면해야 했다.
<제국이라는 유령>에 실린 11편의 논문을 통해 <제국>에 관한 고차원적인 비판들을 접할 수 있다. 이 한 권으로 족하다. <제국>을 읽은 독자에게도, 혹은 읽지 않은 독자에게도 <제국이라는 유령>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을 통해 <제국>의 쟁점과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비록 이 책의 저자들이 <제국>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두 입장 간의 절충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지구화에 대한 평가야 어찌 되었건 하트와 네그리, 그리고 <제국이라는 유령>의 11명의 저자들 모두 반자본주의라는 공통된 깃발 아래 있다면, 상대방의 결함을 지적하고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서로의 장점을 취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논거 없는 주장은 무익하며 실천 없는 선언은 공허하다. 저자들이 비판해 마지 않는 아상블라주식 짜깁기가 아니라 현실에 기반하고 실천을 전제로 하는 이론이라면, ‘유령’은 허상이 아닌 실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i] <무너지는 환상 Bonfire of Illusions, 2010>, <장기 20세기 The Long Twentieth Century, 1994>,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First As Tragedy, Then As Farce,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