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희 몽골방랑 -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김홍희 지음 / 예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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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금으로부터 약 800여 년 전, 세계는 작지만 강인한 민족에 의해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은 말을 자신의 몸과 같이 다룰 줄 알았고 광활한 초원을 떠돌던 유목민 특유의 강인함으로 세계사에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제국을 건설했다. 화무십일홍일까. 유목민의 정체성을 던지고 영농민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정착을 해서 그랬을까. 내부분열이 원인이 되었을까. 제국은 200년도 채우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비록 후신이 남아서 여전히 힘을 자랑했지만 위대한 대칸은 더 이상 출현하지 않았다.

13세기~14세기 몽골제국이 세계를  경영하던 무렵의 역사는 매우 흥미진진하다. 3대 몽케 칸 이후로 일족은 분열했고 끝내 마음으로 합심하지 못한 채 몰락했다. 이에 대해 나에게는 많은 의문부호가 따라다닌다. 몽케 칸이 불의의 죽음을 당하지 않고 제대로 치세를 펼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차가타이의 칸 불패의 티무르가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을 때 병사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전에 2대 대칸 오고타이의 죽음 후 형제들이 쿠릴타이에 신경쓰지 않고 계속 유럽 정벌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일족이 분열하지 않고 제국의 역사가 300년 이상 지속되었다면 세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지금 몽골의 사람들은 그들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위대한 칭기즈칸의 후예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살고 있을까, 아니면 모든 것을 잊고 현실에 수긍하고 살아가고 있을까? 초원의 늑대는 살아있을까? 몽골은 과연 어떤 곳일까?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적 상관관계를 지닌 몽골은 꼭 가보고 싶은 나라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가지 못하고 늘 아쉬움만 간직하고 있는 나에게 소원하던 몽골로의 여행을 책으로나마 대신할 기회가 최근 자주 생기고 있어 위안이 된다. 이번에 예담에서 출간된 <김홍희의 몽골방랑>도 그런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사진가 김홍희는 스스로를 그저 사진가로만 한정짓기를 거부하고 작가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책은 수필로 분류된다. 지금 그는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것도 시인으로 등단하기를 꿈꾸는 그의 의지가 반영되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2003년 몽골에 다녀온 후 쓴 600페이지의 원고는 모두 찢어버리고 2006년 다시 몽골을 다녀와서 <김홍희의 몽골방랑>을 출간했다.

<김홍희의 몽골방랑>은 단순한 사진 책이 아닌 여행 책이다. 아니 일반적인 여행 책이 아니라 많은 것을 사유하게 하는 인문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단순히 현장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낸 여행서나 몽골관광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도 아니다. 작가가 몽골을 여행하며 깨달은 점과 몽골 그리고 사람을 고스란히 담아낸 수필집이다. 생생한 사진이 실려 있다는 점이 여느 수필집과 차이를 보인다 하겠다.

기나긴 암흑의 통로를 빠져나온 대가로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가 웬만큼 해결되었고 이제 힘든 사람들을 돕고 살 수 있는 위치에 살고 있다. 기술의 진보도 이루어져 아날로그시대의 필름카메라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사진이 전문가의 소유물이던 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과 같이 사진의 일상화가 이루어지기 전 여행은 글로 대부분 기록되었고 사진은 가끔 볼 수 있는 첨부자료 정도였다. 이제는 사진이 당연하다는 듯 글의 옆자리를 꿰어 찬지 오래다. 사진이 없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고 어쩔 땐 주객이 전도되어 글보다는 사진을 우선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진도 동영상이라는 차세대 주자의 등장으로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

이 시점에 와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은 무엇일까? 아마 모든 사진가들이 궁구하는 근원적인 물음일 것이다. 문명의 이기로 태어나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 사진은 사람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해왔다. 그런 사진일진데 새로운 문명의 이기의 등장에 쓸쓸히 사라져야 하는 운명의 그저 그런 기술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인간 김홍희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김홍희는 부산에서 건축을 전공한 후 198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비주얼 아트에서 포토저널리즘을 공부하며 전공을 바꾸었다. 1학년 때 신주쿠 니콘살롱에서 2학년 때는 올림푸스홀에서 개인전을 가질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가 낸 수필집 <방랑>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실려 있다. ‘강물에 사람이 떠내려가고 있다. 너는 사람을 구할 능력이 있다. 이 때 사람을 구하겠느냐 사진을 찍겠느냐.’ 라는 스승 마쓰자키의 물음에 김홍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장 그 순간에 제가 사람을 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도처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면 그럴 때마다 제가 사람을 구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한 번에 많은 사람을 구하는 방법, 즉 근원을 차단하는 방법이 있고 사진이 한 방편이라면 그 때는 사진을 찍는 거죠. 이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입장이 확고해야만 분명한 선택이 가능합니다.’. 김홍희의 사진관을 알 수 있게 하는 일화다. 그에게 피사체는 단순한 사물이나 사진을 찍히는 대상이 아니다. 사유를 하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이다. 그 존재는 그대로 진리이며 사실과 진실을 알 수 있게 하는 기준점이다. 그는 사진을 통해 진리와 진실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려고 한다.

진리란 무엇인가? 사람을 보다 사람답게 살게 하고 죽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마음과 몸을 편안하게 하여 세상과 격리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진리는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닌 가까운 곳, 바로 우리 일상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사진이란 흘러가는 시간의 조각을 떼어내어 영원으로 고정시키는 작업이라고 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그래서 모두 소중한 작품이 된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작품이 모여서 이루어진 결정체로 그대로 진리이며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을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인 것이다. 사진은 그런 삶을 담아 내는 것이다. 사진은 기억이고 메시지이다. 삶이고 문자와 같은 의사표현의 수단이다. 한 장의 사진으로 많은 것을 담을 수도 있으며 하나의 메시지만 담을 수도 있다. 한 인간의 삶, 한 국가의 역사를 담아낼 수도 있다. 진리와 진실을 보여줄 수도 있으며 숨기고 거짓을 보여줄 수도 있다. 아픔과 슬픔을 담아낼 수도 있고 감동을 담아낼 수도 있다. 사진은 그렇게 사람을 위해 태어났고 떨어져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사진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이번 책에서도 김홍희가 사진에 대한 의미를 고민하고 사유한 흔적이 곳곳에 뭍어난다. 


게르는 몽골인이 유목민의 정체성을 아직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하지만 시대는 크게 변했고 몽골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식사도 잠도 말 위에서 해결했던 선조와는 달리 지금의 몽골사람들은 자동차에 더 익숙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유목민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변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고 변하지 않는 국가도 없으니까. 하지만 누군가는 전통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을까. 



매사냥꾼과 말을 타고 있는 어린 소년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든다. 사진을 보는 순간 예전 TV에서 매를 키우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사냥매를 키우고 보유하는 것은 이제 잊혀진 과거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영상이었다. 아직도 저런 전통을 이어가는 부족이 있었다. 손자는 할아버지가 매를 어깨에 올리고 평원을 바라보다 매를 보내 사냥을 하는 모습에 몹시도 부러운 눈치를 던졌다. 그리고 자신도 꼭 할아버지처럼 되겠다는 꿈을 피력해 나를 감동하게 했다. 문명과 떨어진 생활을 하는 그들 조손을 보며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던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 행복하냐고 말이다. 문명과 접촉하지 못 한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 하다고 해서 불행할까. 그렇다면 매년 세계행복지수를 조사해 발표하는데 그 상위권에 속하는 국가는 모두 문명국이어야할 것인데 결과는 그렇지 못하다. 경제적, 산업적으로 낙후된 아프리카의 국가나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국민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우리보다 훨씬 높다. 이것은 물질적 문화적 풍요가 행복으로 직결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결과가 아닐까. 가진 자는 가진 만큼의 고민을 떠 안고 살고 있는 게 아닐까. 말을 타고 있는 어린 소년의 해맑은 표정 너머에 웅장한 초원을 달리던 용사의 모습과 기상이 보이는 것 같다. 이 소년이 그런 것을 그리고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미래의 어느 날 빼어난 초원의 기수가 탄생할 것만 같다. 




 

 

 

 

 

 

 

 

아직은 순수하고 행복한 웃음을 머금고 살아가는 몽골사람을 사진으로 대하면서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이룬 한국은 행복한가. 나는 행복한가. 저 사진 속처럼 행복해 보이는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따뜻한 침대를 벗어나 차가운 바람이 부는 초원의 게르에서 잠을 자면서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떠나서 기름이 둥둥 뜬 국물과 잘 씹히지도 않는 양고기를 먹으며 행복해할 수 있을까.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길 위에 그려진 바퀴 자국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로 이어지는 것일까. 길 위에 세워진 이정표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이정표가 내 인생의 목표와 종착점을 가리켜줄 수 있을까. 인생에 있어서 그와 같은 이정표는 없을까.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내 삶을 환하게 비출 수 있는 그런 절대적인 것이 어디 없을까.

산행을 하다가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끊어지고 길이 사라지면 당황한다. 그럴 때 자신을 믿지 못하면 지도에 의지해도 길을 찾기가 힘들고 무작정 헤매게 될 가능성이 높다. 당황하지 않고 신념을 가지고 자신을 믿고 길을 찾다보면 제대로 된 길을 발견하거나 이정표를 찾을 확률이 높아진다.  내 삶의 이정표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김홍희는 이 책을 통해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몽골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며 그래서 몽골로 간다고 말했다. 카메라도 사람과 같아서 어떤 것을 보는 순간은 뜬 눈이지만 메모리가 되는 시간은 눈을 깜박이는 탄지의 순간이라고 한다. 그러니 실제로 촬영되는 이미지란 사진가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카메라의 숙명이자, 사진가의 운명이라고 한다. 사진가의 사진을 본 사람들이 그 장면을 사진가가 본 것으로 인정을 하지만 사진가는 실제 보지 못한 것이다. 이런 허위의 기초 위에 사진을 세상에 발표한다. 발표는 곧 사진가가 거기 있었다는 증언이지만 실제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또 다른 사실의 증거이기도 하다. 김홍희는 진솔히 자신의 생각을 이와 같이 밝혔다. 그래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고 술회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 책을 본 사람들은 그가 거기 있었다고 인정할 것이다. 이렇게 순환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설사 그가 본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할 지라도 왜 그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지 이유와 목적까지 잊었을까. 손의 떨림이나 시간의 흐름에 의해 장면의 구도나 사람의 모습이 조금 달라진다고 한들 무슨 큰 상관이 있을까. 나는 그것을 통해 몽골을 보고 사람을 보고자 하는 것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그의 사진 속에서 오히려 많은 것이 보이고 느껴졌다. 그리고 사유를 통해 내가 느낀 것과는 달리 그가 담아내려고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의문마저 생겼다. 아마도 사진에는 그가 본 사람과 삶에 대한 진리가 고스란히 담겨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 아닐까.

나는 진리와 진실을 찾아 몽골로 다시 떠나고자 한다. <김홍희의 몽골방랑>은 그런 나에게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할 것이다. 나와 함께 몽골로 떠나 사람과 인생 그리고 행복에 대해 함께 고민할 사람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덧붙임 : 왜 사진을 찍느냐는 물음에 김홍희는 ‘세상의 정화에 도움이 되기 위해 사진을 찍습니다. 사람,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죠.’라고 대답했다.   
 

<사진 출처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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