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보는 민주당이 노동 계층을 보호한다는 믿음으로 민주당을지지했다. 이런 신념은 할모에게도 전파되어 할모는 ‘정치인들이모두 사기꾼일 수도 있지만, 예외가 있다면 당연히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의 뉴딜 연합 세력일 것이다‘라고 생각을 바꾸게됐다. 그래도 할모와 할보는 땀 흘려 노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고 믿었다. 두 분은 사는 게 녹록지 않다는 걸 알았으며, 무엇인가 이루려고 할 때 본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더 오랫동안고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자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할모는 틈만 나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절대 자기 앞길만 높은 벽으로 막혀 있다고 생각하는 빌어먹을 낙오자처럼 살지 말거라. 네가 하고 싶은 일이면 뭐든 할 수있단다."
나는 경제적으로 원거주자들을 따라잡았던 우리 조부모님이 정말로 새로운 문화에 동화된 적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 두 분은 항상 새로운 삶에 한 발을, 과거의 삶에 다른 한 발을 담근 채살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며 몇몇 친구를 사귀기도 했으나, 두 분의 뿌리는 늘 켄터키 고향 땅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두 분은 개와 고양이를 기르자는 아이들의 청을 결국에는들어줬지만, 집에서 동물을 기른다는 걸 끔찍하다고 생각했으며, ‘가축은 식용 외에는 쓸모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자식들은 달랐다. 우리 엄마 세대는 중서부 공업 지역에서 자란 첫 번째 세대로서, 걸쭉한 사투리나 교실 하나짜리 산골 학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엄마 세대 사람들은 수천 명의 학생들과 함께 현대식으로 건축된 고등학교에 다녔다. 우리 조부모님의 이주 목적은 켄터키를 벗어나 자식들에게 유리한 조건에서 시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었고, 유리한 입장에서 출발한 자녀들이 차례차례 원하는 바를 이뤄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자녀의 삶은 그들의 바람대로 풀리지 않았다.
친오빠인 지미 삼촌이 집에 들렀을 때 위 이모는 오빠가 자기의 멍든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지하실에 숨어 있었다. 삼촌이 더는 가족들과 함께 살지 않았으므로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이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엄마가 특히 심했지만, 모두가 그런 식으로 살았어. 그냥…… 드러내기 너무 부끄러웠던 거야."
자식이나 손주들은 대학에 가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모와 할보는 켄터키에 남은 형제들에 비해 말도 안 되게 부유했다. 어린 시절에는 신시내티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지만, 어른이 된 후로는 대서양과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가본 사람들이었다. 본인들이 이 정도로 성공했으니, 자녀들은 훨씬 더 크게 성공하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었다. 세 자녀 모두가 어수선한 가정생활에서 엄청나게 큰 영향을받고 있었다. 할보는 지미 삼촌이 제철소에서 씨름하는 대신 학업을 이어가길 바랐다. 삼촌에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마 직장에 들어가면 돈이 마약처럼 돼버려서 처음에야 그 맛이 달콤하겠지만, 결국 돈 때문에 진정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될 것이라고경고했다. 심지어 암코 지원서의 추천인란에 본인의 이름을 쓰지도 못하게 했다. 할보는 암코가 아들에게 그저 돈만 쥐어주는 게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암코에 취직하면 삼촌은 어머니가 아버지의 이마에 꽃병을 내던지는 집구석에서 독립할 수 있었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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