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남편이었던 사람의 관계는 저 밑바닥부터 망가져 있었기에 우리 둘 사이에는 대화가 전혀 없었다. 종종 세간에서 저 부부는 싸움만 하더니 결국 헤어졌다고들 하는데, 그런 부부는 아직 예전 같은 관계를 회복할 가능성이라도 있는 셈이다. 진짜 망가진 부부는 대화 자체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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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항상 여기 있지. 내일이란 건 없고." - P105

더 길게 이야기했다가는 두 사람 모두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갈 수도 있다. 나머지 이야기는 원래의 자리, 그의 가슴속, 붉은 심장이 있었던 자리에 묻은 양철 담뱃갑 속에 그대로 둘 것이다. 담뱃갑의 뚜껑은 녹슬어서 굳게 닫혀 있었다. 이 다정하고 강인한 여인 앞에서 그 뚜껑을 열지는 않으리라. 세서가 그 안에 담긴 것의 냄새라도 맡는다면, 그에게 너무나 수치스러운 일일 테니까. 게다가 그의 가슴속에 미스터의 볏처럼 빛나는 붉은 심장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그녀도 상처받을지 모른다. - P126

어둑어둑한 식당 부엌에서 빵을 반죽할 때처럼. 아직 요리사도 도착하지 않은 시각, 벤치 하나 길이만큼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우유 깡통을 쌓아놓는 곳 왼편 뒤쪽에 생긴 좁은 공간에서 반죽하는 일. 반죽을 주무르고, 또 주무르는 일. 밀려드는 과거를 내쫓는 힘겨운 일과를 시작하기에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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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서로 손을 잡지 않았지만 그림자들은 손을 잡고 있었다. 세서가 왼편을 힐끗 보니, 세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손에 손을 잡고땅 위를 미끄러져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옳은지도 몰라. 인생.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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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한 거죠.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게 의외로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거든요."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모르겠지, 정하야. 너는 이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어떤 문제들은 피할 수가 없어. 고체보다는 기체에 가깝지. 무정형의 공기 속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짓눌려. 나는 감정에 통제받는 존재일까? 아니면 지배하는 존재일까? 나는 허공중에 존재하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해.

잠시 머물렀다 사라져버린 향수의 냄새. 무겁게 가라앉는 공기.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 오래된 벽지의 얼룩. 탁자의 뒤틀린 나뭇결. 현관문의 차가운 질감. 바닥을 구르다 멈춰버린 푸른색의 자갈. 그리고 다시, 정적.
물성은 어떻게 사람을 사로잡는가.

모든 상황은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사람을 무너뜨린다.
만약 그때 엄마가 선택해야 했던 장소가 집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어떻게든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면. 표지 안쪽, 아니면 페이지의 가장 뒤쪽 작은 글씨, 그도 아니면 파일의 만든 사람 서명으로만 남는 작은 존재감으로라도. 자신을 고유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남길 수 있었다면. 그러면 그녀는 그 깊은 바닥에서 다시 걸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를 규정할 장소와 이름이 집이라는 울타리 밖에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녀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끈이라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공간 속에서 은하는 어느 때보다도 선명해 보였다. 그녀가 살아 있던 때에 지민은 이따금 엄마가 공기 중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문득 떠올린 것은, 엄마와 함께 살던 집에는 엄마만의 방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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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활 타는 장작불과 버터 향 풍기는 따끈한 머핀, 시나몬 토스트에 프라이니가 아주 좋아하는 포푸리 향이 기운을 북돋우며 일행을 맞았다. 용 그림이 그려진 두 개의 커다란 중국제 청동 그릇 안에는 장미 잎과 꽃잎, 버베나와 흰 붓꽃 뿌리가 가득했고, 벽난로 옆에는 윈터스위트*로 채워진 기다란 파미유 로즈**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프라이니는 여우 털로 장식된 크림색 벨벳 가운을 기쁘게 벗어 던지고 실크 파자마에서 쏙 빠져나와, 제일 좋아하는 목욕 오일인 레브 뒤 코케트 향을 풍기는 따스한 물속에 몸을 담갔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프라이니는 가장자리가 여우 털로 장식된 값비싼 실내용 가운에 빛 바랜 듯한 러시아제 가죽 부츠 차림의 여자였다. 말끔한 검은 단발머리에 감싸인 창백하고 우아한 얼굴은 차가워 보였고 녹색 눈동자는 속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 멋쟁이 아가씨 옆에는 침대보 같은 셔닐* 가운을 입고 땋은 머리를 한 수수한 아가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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