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 홍승희 에세이
홍승희 지음 / 김영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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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동물인 인간. 인간은 절대 혼자 살 수 없다. 서로 도와가며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간다. 인간은 가족에서 시작해 더 큰 사회를 만들어간다. 학교, 국가, 지구촌. 우린 태어날 때부터 사회에 속한 개인이 된다개인들은 무수히 많은 결들을 지니고 있다. 세상은 그 무수히 많은 결들의 집합이다. 무수히 많은 결들의 사람들이 모여 이룬 사회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결을 지닌다. 그 결들은 단순히 개인들의 합이 아니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따라 또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사회는 스스로를 유지하는 걸까? 유지되는 걸까? 이렇게 무수히 많은 결들은 지닌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 걸까? 서로를 생각하는 이타심?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기심? 어떤 동력이 됐든, 사회는 무수히 많은 개인들을 품은 채 유지되고, 자신을 유지하고 있다.

개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사회계약을 통해 사회를 만들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질서를 유지하는 법, 일반적인 상식, 사회적 합의. 다 사회계약의 언어들이다. 우린 태어날 때부터 사회에 속하므로, 이 계약에 도장을 찍지 않았어도 계약 당사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계약의 조건이 과연 이상적일까? 이 계약 내용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일까? 절대 아니다. 그 계약 조건은 보편성을 띠려 노력하지만,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고 누군가에겐 자신을 조이는 굴레가 될 수 있다. 또한 어떤 부분에 대해선 공감하지만, 어느 부분은 절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개인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사회 계약을 부정해야 할까? 아니면 부당하더라도 사회 유지를 위해 따라야 할까?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없는 것 같다. 자신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더라도 타협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항상 타협해선 안 된다. 결국은 사회는 개인의 집합이므로 개인들이 변하면 사회도 변하기 마련이다.

요즘 페미니즘 운동이 한창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회적으로 합의도 이뤄져 있지 않은데, 저렇게 과격하게 나오면 누가 좋아하겠어? 사회적 합의는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움직임, 노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사회적 합의의 주체는 모호하다. 어디까지 사회인가? 모든 사람이 용인할 수 있는 것은 없는데, 얼마나 합의가 돼야 사회적 합의가 됐다고 할 수 있을까?

개인은 사회를 유지하며 변화시키는 양가적 존재이다. 사회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지만 사회의 계약, 말을 반드시 따르기만 하는 존재는 더욱이 아니다. 이 둘은 결코 배타적이지 않으며, 서로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서로의 원동력이다.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답을 찾으려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할 필요도 없다. 이 둘 말고도 또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다. 애매함 속에서 나와 우리는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아파도 돼 아픈 건 이상한 게 아니야. 아프지 않은 척, 망가지지 않은 척이라는 이 세상이 이상한 거야. 너는 정직한 만큼 자꾸 죽고 싶은 거야. 이상한 건 네가 아니야. 너를 의심하는 세상을 믿지 마.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폭력에 힘을 보태지 않으려고 고기를 안 먹는다.
서툴러도 채식주의자이고 싶다. 조금이라도 내 존재가 덜 가해할 수 있도록.

그저 이 순간을 붙잡고 싶다.

나의 위치를 염려해주는 사람들이 나이와 함께 늘어간다. 여러 기성 멘토들의 강연이나 책이 주는 해방도 일시적이다. 과정에 열정을 부으라고, 그러면 성공을 따라온다고 말한다. 그들의 배후에는 결국 ‘무엇이 되어줘’ ‘너의 재능을 근사한 상품으로 만들어줘’가 숨겨져 있다. 젊음은 이력을 만드는 시간일까. 성과 없는 젊음은 젊음이 아니까.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순간순간의 텅 빈 느낌으로만 살아가고 싶은 열망은 바보 같은 걸까. 모두가 각자의 위치를 경쟁하고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지 않고서도 영감을 공유하는 오늘은 불가능할까.

아픈 와중에도 침묵해야 하는 것은 얼마나 아플까.

비가 그친 후 파슈파티강은 쓰레기와 잿더미로 썩은 물 냄새가 나고 혼탁해졌다. 강물은 더럽지 않다. 물결은 햇빛에 반짝인다. 하늘을 비추고 밑으로 흘러간다. 혼탁해도 물의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물처럼 변하지 않는 성질을 누군가는 존엄이라고 말했다. 세상에는 더러운 것이 없다. 혹은 모두가 더럽다. 눈물은 흐르는 만큼 흩어지고 흩어지는 만큼 만난다.

열매나 잎사귀가 영원히 열리지 않아도 까마귀가 앉았다 갈 수 있는 나뭇가지인데. 그림까지도, 삐뚤빼뚤한 고유의 선마저도 병리적인 것으로 판단한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움이 될 수 없을까.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자기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패배자라고 말하는 이 세상처럼 상담사는 나의 볼품없고 깡마른 나뭇가지를 패배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패배가 뭐 어때서. 성공이라는 진통제로 오늘을 죽은 것으로 남기는 것보다 오늘 자기 의지로 죽는 패배자가 낫지 않나요.

내가 무엇을, 누군가를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하는 권태와 오만, 혐오
모른다는 걸 알기에 환대할 수 있다.

정직한 무지가 서로를 가깝게 한다. 우리에겐 더 많은 언어가 아니라 더 많은 무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는 무지. 나는 나를 모르듯 당신을 모른다. 삶이 뭔지 세상이 뭔지 몰라서 여기저기 걸어 다닌다.

이 책을 읽으며, 우울함이 많이 느껴졌다. 책을 쓰는 중에도 많이 우울했고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저자의 감정을 100%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의 말 중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이 책을 읽으며 한 명의 후배가 떠올랐다. 그 아이를 옆에서 지켜보면 정말 가진 게 많은 아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부러운 아이! 그렇기에 더욱 욕심이 많은 걸까? 100%를 채우기 위해 항상 달리는 것 같다. 인간이 모든 분야에서 100%가 될 순 없다. 어떤 것은 포기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래도 가진 게 많은 아이니깐 지금보다 더 성장할 거라 확신한다!
 그 아이를 떠오르게 하는 구절을 그에게 읽어보도록 했다. 그의 반응은 "고통을 미화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했네요. 지금 고통스러우면 저렇게 쓸 수도 없을 텐데. 예술가라 그런가 봐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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