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된 정신의 확산 바다로 간 달팽이 15
박영란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악'의 치명적 매력에 대하여

"조의 행동들은 아주 아슬아슬한 어떤 지점에 놓인 감각을 깨우는 힘이 있어서, 찬사와 경멸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 점이 조를 선망하게도 하지만, 동시에 침을 뱉게도 했다."(p.128)

 

 

이 소설 속 주인공 '나'는 이혼한 부모로 인해 혼자 독립해산다. 누가봐도 놀랄만큼의 큰 덩치를 가진 여학생이며 태권도와 특공무술을 배운 전력이 있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중학교 때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 패거리를 혼내 준 후로 자기도 모르게 외톨이가 된 주인공 '나'. 그런 그녀를 학교에서 센 캐릭터로 정평이 난 조가 계속 눈여겨본다. '나'는 타의반자의반으로 왕따를 자처하며 조용한 일상을 살기를 바라지만, 자신도 모르게 조에게 끌리는 마음에 혼돈스럽기만 하다.

 

어느 순간, 마치 자신의 집인양 '나'의 집 문을 열고 들락거리는 조. 결국 '나'는 자신도 모르게 조의 세계에 빨려들어가 거부하지 못하다가 그들의 패싸움에 말려들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당사자가 되기도 했다가 관찰자가 되기도 하기를 몇차례 반복한다. '나'는 자신이 왜 조에게 자꾸 끌리게 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의 갈피를 잡기 매우 힘들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외로움, 연민, 갈등, 분노 등의 여러가지 감정을 느낀다. 이것은 곧 '나'가 악순환적인 사건에 휘말리면서 선택과 고민을 반복해나감으로 인해 성숙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기에 꽤 주목해볼 만 하다.

 

"우리도 알아. 우리한텐 아무것도 없다는 거. 고등학교 졸업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거. 너도 마찬가지잖아. 다만 우리처럼 살 용기가 없는거지. 너 같은 애들은 미래에 뭐라도 될까 싶어서 꼼짝도 못하지. 우린 안 그래. 우린 미래 따위 생각 안 해. 지금 여기만 생각해.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갖고 싶은 거 가져야 되고, 하고 싶은 거 해야 돼!"(p.157)

 

비행 청소년들의 용감한 일탈이 과연 어떤 생각에서부터 시작되는가를 매우 명쾌하게 알려주는 대목이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현재에 가지고 싶은 것에만 몰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악을 낳고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면서 자신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는지를 이 소설은 굉장히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다루고 있다. 책 표지만큼이나 음습한 기운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감돈다. 불량 청소년들 무리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법한 사건과 심리묘사를 매우 잘 하고 있어서 놀랍다. 문득, 나의 학창시절 '문제아'였던 친구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내가 그들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들과 다시 대면하게 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한때, 나 역시 괜히 그들의 눈밖에 나거나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심 선망을 하기도 했다는 점을 새삼 발견하게 됐다.

 

언젠가 한번은 내가 중학교 다닐 당시, 조처럼 '센캐'였던 친구를 동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났다. 항상 컷트 머리에 보이시한 매력을 풍겨 늘 후배들로부터 선물 다발을 받아들고 다니던 그녀는 어느덧 뽀글머리에 얼굴이 푸석한 아줌마로 변해 있었다. 조처럼 가장 위에서 조종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은 아무 상관없는 일인양 고고한 척 하던 그 아이의 모습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평범한 주부로 엄마로 살아가고 있음이 얼마나 웃음이 나던지.....

 

문득 이 책에 대해 어떤 평가나 별점을 매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년 소설 작품으로서 재미와 흥미를 떠나 우리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인간이 얼마나 '악'을 멀리하고 싶어하면서도 그 속에 빨려들어가기 쉬운 존재인지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 악이 우리 사회 전체에 얼마나 많이 확산되어 가고 있는지도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내 생각엔 말이지. 싸움을 겁낸다는 건 죽도록 원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지. 다시 말해 이래도 좋고, 저래도 큰 불만 없고, 그런 정신이면......죽도록 원하는 쪽이 이기게 되어 있어."(p.193)

 

 

또 한번 소름이 끼치게 했던 대목이다. "어떤 싸움이든 죽도록 원하는 쪽이 이기게 되어 있다"는 말, 싸움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죽도록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 가슴을 쾅 쳤다. 세월호 유가족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의 절규와 눈물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려서 견딜 수 없었고,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그저 제 3자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는 게 괴로웠다.

 

 

"못된 정신은 멋진 모습으로 나타나지. 모두 꼼짝 못하게 말이지. 그래서 그 편에 서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되지. 말하자면 이기는 편에 서고 싶다는 욕망, 그게 이 세계의 모순이기도 하고.(중략) 못된 정신에 비해 착한 정신은 적지만 견고할지도 몰라. 중요한 건 우리 안에 착한 정신 편에 서려는 욕망이 있고, 결국은 의지를 내보인다는 거지. 인류의 역사를 봐도 알 수 있어. 못된 정신이 한차례 확산되고 나면 뒤이어 착한 정신이 그걸 뒤덮기를 반복하니까. 그렇지 않다면 인류는 벌써 멸망했을수도 있지. 한 사람의 인생에서도 못된 정신이 확장될 때가 있고, 착한 정신이 확장될 때가 있는 것처럼......그게 인류고, 그게 인간이지."(p.194)

 

작가는 주인공 '나'의 새 아버지 입을 빌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꺼낸다. 못된 정신을 혐오하면서도 그 편에 서고 싶어하는 인간의 탐욕에 대해, 그리고 악과 선이 엎치락 뒷치락하면서 생명력을 유지해가는 인류에 대해. 악의 칠흑같은 어둠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으로 인해 더욱 밝게 빛나는 선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 소설은 인간이 왜 인문학적 사고를 훈련해야 하는지, 그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성을 통한 각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주목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성장소설인 동시에 인문 소설이다."(p.236)

 

 

이야기가 끝난 후 해설자의 글을 읽으며 다시 스토리를 곱씹어보고 느낀 바를 정리할 수 있어서 참 좋았던 책이다. 사실 읽는 동안에는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읽고 난 후에는 오히려 많은 여운과 생각을 불어넣어준 놀라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반전이나 재미요소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안정적인 호흡으로 자신이 주고자 한 메시지를 스토리 속에 잘 녹여낸 작가의 노력에 큰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