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를 만나다 - 구토 나는 세상, 혐오의 시대
백숭기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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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쓴 서평글입니다 -


구토 나는 세상, 혐오의 시대에,

지금 우리는, 사르트르가 필요하다.

한동안 쇼펜하우어, 니체의 철학이 유행된 적이 있다. 암울하면서도 냉랭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강한 독설들은 우리의 마음에 강렬하게 와닿았다. 하지만 지은이는 말한다. '인생이 고통이다', '친구는 되도록 적게 사기고 쓸데없는 친구는 먼저 손절해라'와 같은 말들이 상처를 입은 영혼들에게 과연 많은 힘을 줄 것이냐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 사르트르가 필요하다. 이런 혐오의 시대에 그는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으로서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다. 그는 기인이면서도 실천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닌 직접 행동하는 것이라며 사회 부조리함에도 강인하게 항거한 실천주의자였다. 또한 그는 부조리한 현실을 보며 구토를 느껴야 하며 삶에 용기있게 참여해라, 즉 '앙가주망(engagement)'를 외친다. 그의 철학은 냉소와 강한 독설이 아닌 '휴머니즘'이다. 그의 어록들은 많이 들어보았다. 예를 들어 '타인은 지옥이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와 같은 것이 그 예이다. 여기서는 살롱에서 두 사람간의 대화를 통해 사르트르의 철학을 쉽고 명쾌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타인은 지옥이다"

혼자 있는 나는 과연 행복한 걸까? 냉소적인 철학자는 혼자 있음을 무서워하지 말라, 과감히 선을 긋고 혼자임을 즐기라고 했으며, 사르트르 또한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표현했다. 사르트르 또한 같은 의미로 발언을 했던 걸까? 지금 현대사회는 극강의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다. 회식을 하는 대신 혼밥을 즐기고, 칼퇴 이후 자기만의 여가 및 취미생활을 하기에 애쓴다. 조금이라도 나의 생활에 간섭하려고 하면 선을 긋고 워라밸을 강하게 지키려고 한다. 과연 사르트르는 타인을 경계하고자 쓴 말이였을까. 그가 진정 말하고 싶었던 것은 타인의 시선에 포착되어 자신의 자유가 박탈된 삶이야말로 지옥 아니겠는가. 타인의 장벽에 우리를 스스로 내세워 타인의 안목과 눈치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그 순간 타인이 바로 지옥이 된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타인을 지옥으로 만들지 말고 남의 기준과 잣대가 자신을 맞춰 살지 말고,진정한 자유인으로 살 것을 외친다.


'말은 장전된 총이다'

말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 그만큼 말에 관한 속담도 많은 이유일 것이다. 철학자 하이데거 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표현했다. 말은 단순히 음석이나 소리에 그치지 않고, 한 사람의 존재를 대변한다는 뜻이다. 사르트르 또한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생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치는 도구(총)이라고 표현했다. 언어에 강력한 힘이 있으므로, 그리하여 사르트르는 작가라면 글과 말을 통해 사회와 정치 현실에도 참여하여 타격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언어 사용은 자유롭지만 거기에도 응분의 '책임'이 필요하다며 사르트르는 모든 언어에는 과녁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자유의 철학자라고 불리우는 사르트르의 대표적 금언이 바로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이다. 사르트르는 존재를 '즉자존재'와 '대자존재' 두 가지로 나뉘었다. 즉자는 자기 이퀄(=),자기를 뜻하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대자는 자시 자신에 대해 의식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것은 즉자가 대자를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는 자의식이 없는 물건 같은 존재로 살아오며 자유에 대해 아무런 갈망도 없는 상태로 남아있으면 안되며, 내 인생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실존을 그대로 놔두지 말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실현해야만 한다. 다만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꼭 져야 한다. 그것에 대해 불안과 두려움을 끊임없이 느낄 수 있지만 자유인으로서 가져야 할 후유증으로 표현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존재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의 뜻이다. '본질'은 사물의 변하지 않는 특성이자 존재 이유이다. 사람이 일방적으로 사람이 존재 이유와 명분을 정해주는데, 즉 사람이 앉기 위한 의자, 잠잘 때 눕기 위한 침대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실존'은 그러한 본질이 규정되지 않는 존재, 규정되기 전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자나 침대와 같이 본질이 정해지지 않은 채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 미완성품으로 나옸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는 원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내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항상 탐구하고 연구하며 나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판단하지 마라"

사르트르는 특히 보부아르와의 계약 결혼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사랑에 있어서도 '본질적인'사랑, 즉 어떤 조건도 끼어들지 않는 순수한 사랑의 관계를 맺었다. 이는 사회적,문화적,경제적 조건이나 명분이 개입되지 않은 상대에 대한 본질적인 그 사랑 자체만을 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래서 서로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외도를 저질러도(!) 인정하기, 우연적인 사랑도 서로에게 용인하기로 한 것이다. 나라면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순간 생각해보았다. 그들의 계약결혼 조건은 3가지였다. 첫째, 서로의 우연적인 사랑을 용인할 것, 둘째, 서로에게 절대 거짓말하지 않을 것, 셋쩨, 결제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지 말 것. 이렇게 내가 상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내 주체성도 지키고 사랑하는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는 완벽한 조건들을 나는 과연 지킬 수 있을까, 지상에서 이러한 본질적인 사랑을 실험한 커플은 몇 안 될것이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이 약속을 지켰고, 생을 마감한 뒤에도 가족 묘지에 묻히기보다 사르트르 옆에 함께 묻혔다.

(보부아르 또한 '제 2의 성'을 발표하며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구절을 남겨놓았으며 여성이 사회적, 역사적으로 억압받아온 과정을 분석하고 여성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 실존주의 철학+페미니스트 결합을 통해 여성의 자유와 자아를 찾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깊이 연구했다. 그래서 어쩌면 더더욱 사르트르 철학자와 마음이 잘 맞는 드문 여성이었을지도 모른다.다른 여성이었다면 진작 헤어졌을지도!)

"참여는 행동이지 말이 아니다"

사르트르는 사회 참여를 많이 한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프랑스 대학생들의 봉기로 시작된 68혁명에서 시위대의 폭력을 공개적으로 옹호해 시위대와 대학생들의 편에 섰다. 그의 철학 핵심이 바로 '앙가주망', 지식인의 사회참여에 있었기 때문이다. 약자 편에 서는 데 주저하지 않고 당당히 사회의 그늘에 빛을 비춰주고자 노력했으며 1941년 수용소를 탈출해 조국 프랑스에 도착해 본격적을 레지스탕스(저항하는인간)활동에 뛰어들었다. 또한 프랑스가 식민지로 삼는 알제리의 편에 서서 독립을 지지하고 식민지 건설을 일삼는 조국프랑스를 향해 오히려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도 해 지탄을 많이 받았다. 또한 냉전 시대에는 미국의 베트남 참전 반대운돝과 반전 반핵운동에도 앞장섰다. 말로만 하지말고 직접 행동하라!그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에 옮긴 인물이다. 인간이 있어야만 세상도 의미 있다며 실존주의자들은 더더욱 앙가주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리라면 진정 이렇게 '반항'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을까?!

허무주의에 빠진 현대인에게 사르트르는 '인생은 무의미한가?"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실존주의 철학으로서 빛을 던져준다.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본질이 주어지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나에게 주어진 삶을 책임을 다하여 살때 진정 나라는 존재를 찾고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다. 우리 모두의 존재가 우연이라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인인 것이다. 또한 그렇게 선고받았다.

공허한 인생의 의미는 타인이나 남의 시선, 잣대에 맞춰 나가지 말고 스스로 만들어 채워 나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고자 하는,우리 인간 존재의 물음표에 대한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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