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인생도 실패는 아니라고 장자가 말했다
한정주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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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건너가는 모든 이에게, '그 어떤 인생도 실패는 아니라고 장자가 말했다'

제목 자체부터 강한 인상을 심게 하였다. 그 어떤 삶도 실패는 아니다, 내가 어떤 삶을 과거부터 이제껏 살아왔다 하더라도 모든 경험은 나의 길잡이와 삶의 내공을 이만큼 다지게 하는 발판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장자의 철학은 '우화'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장자는 스스로 지어내고 꾸며 낸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의 철학적 메세지를 전한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나니 정말 많은 우화들이 등장하여 나름 재미도 있었고 그런 비유,풍자,은유들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메세지의 의미를 혼자 더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준 것 같다. 작가는 이 책에서 쓴 장자의 메세지들은 나의 의견인 것이지, 장자의 우화나 철학을 읽고 판단 및 생각하는 것은 서로 다르게 느낄 수 있으므로 마음껏 생각을 확장해 사고해보라고 권유해보라고 하셨다.


처음 이 책은 '운명'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이제 삶의 방향은 결정되었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은 우연에 의한 것인지, 운명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그동안 매우 팽팽해왔다. 하지만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기는 어렵다. 분명 아무리 우리가 의지와 능력을 발휘해도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자신의 의지와 역량으로 나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힘도 부분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말하길 운명은 '변화 가능성'과 '예측 불가능'이 두가지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현재, 여기의 삶을 잘 구성하느냐에 다라 우리의 운명은 충분히 변화하고 다시 구성될 수 있다. 또 하나의 본성은 '모호하고 불확실성'이 우리에게는 훨씬 좋은 장점이자 희망의 메세지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자!" 운명은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이므로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될 수도 있다. 또한 운명은 무한히 변화한다. 부유함이 곤궁함으로, 곤궁함이 부유함으로도 바뀔수도 있는 것이다. 삶은 죽음이 되고 죽음은 다시 삶이 될 수도 있다.


또 다른 장에서는 '욕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욕망은 곧 '타자의 욕망'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원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타자의 욕망에 만들어진 나의 욕망'을 의미한다.즉 욕망하는 것은 나이고 나의 소유이므로 내가 욕망의 주인 같지만 우리는 항상 누군가와 비교하고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느라 그것이 실제로 나의 욕망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주입시키며 그것을 나의 욕망이라고 자부한다. 노나라 임금과 바닷새의 우화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대개 상대방이 원하고 바라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런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무엇일까? 가장 익숙하고 널리 알려진 방법은 욕망을 부정하거나 제거하는 방식이겠지만 이것은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 장자는 욕망을 '거울'처럼 대하라고 말한다. 거울은 아무런 과장이나 축소 없이 그 자체를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욕망하는 것을 얻으며 얻은대로, 얻지 못하면 잃은대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구태여 집착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욕망을 좇고 살았다면 지금부터는 정말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찾아 봅시다!


우리는 항상 일상 생활 속에서 불안을 느끼며 산다. 그리고 10대부터 죽을 때까지 사실 평생 우리는 불안을 껴안고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짜피 우리가 불안을 떼고 살 수 없다면 불안을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 그림자를 두려워하다 죽은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불안을 경험할 때 도망치기보다는 불안 속(그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라, 즉 불안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불안의 원인이 되는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결국 불안은 자신 스스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하다는 것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누구든지 궁극적인 것을 터득한 셈이다 -키에르케고르-

이번에는 '앎'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우리는 살아가며 명확하게 아는 것이 있는가? 장자에게 절대적인 '앎'이란 애초부터 조내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앎은 신화에 불가하며 상대적인 것이다.

삶은 한계가 있지만 앎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삶을 가지고 한계가 없는 앎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이다. 그런데로 계속 알려고만 한다면 더더욱 위험해질 뿐이다. -장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앎을 통해서, 즉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에 갇혀서 본다는 의미이다. 우화를 통해 '자기 앎의 안' 즉 자신이 아는 것에 갇혀 버리면 '자기 앎의 밖' 곧 자신이 모르는 것을 절대 볼 수 없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도 있듯이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앎에 갇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자신의 앎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버려야 한다. 또한 앎은 상대적인 것이라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의 람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타자의 삶과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파괴할 수도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자신의 앎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앎을 파멸시키자!


5장에서는 우리가 많이 두려워하는 '죽음'에 관한 얘기를 다루고 있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 관한 우화를 들며 장자는 삶과 죽음은 자연현상이며 자연의 변화에 불과하다는 철학적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죽음을 의식하면 삶은 너무나 혼란스러워진다. 반대로 죽음을 걱정하거나 근심하지 않으면 온전히 지금 여기의 삶, 즉 현실의 삶에 집중할 수 있다. 삶과 죽음 모두 좋게 여기자! 젊음이 소중한 것처럼 늙음도 소중하고 쇠약하고 병든 몸도 소중하다. 우리는 결국 필연적으로 변화를 겪게 된다. 유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의 흐름에 따라 겪게 되는 정신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삶 역시 바꿔야한다. 왜 변화를 받아들이고 순응해야 할까?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무상하기 때문이다. 마흔 이후의 삶은 앞으로 다가올 늙음의 시간을 받아들이고 변화에 순응하는 지혜가 꼭 필요한 시간이다.

장자를 흔히 현실을 도피한 사상가로 오해하지만, 장자는 다른 무언가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해주고 혼란한 시대에 새롭게 살아갈 힘을 부여해주고 있다. 지금 중년의 문턱으로 들어서는 마흔의 삶에 접어든 이가 있다면, 장자의 지혜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보길 적극 추천해본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쓴 서평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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