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다. 거기에 기쁨은 없으며 즐거움조차 누릴 수 없다. 복종이 있을 따름이다. 학업을 마칠 때까지, 사막의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중요한 건 오직 복종이다. 그다음에 우리는 아무것도 읽지 않는다. 신문조차도 우리는 집에 책이 한 권도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작가들에게는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사람들이다. 모래속에 묻힌 집들이랄지, 마귀든 책이든 세상 무엇도 침투할 수 없는 삶들이다. 그들에게도 간혹 사전은 한 권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약삭빠른 영업사원이 팔고 간 백과사전도 있다. 하지만 읽기 위한 책은 아니다. 아이들을 위해, 미래를 위해, 궂은날을 위해 예비해 둔, 가구나 다름없는 책. 참나무로도 소나무로도 만들어지지 않은 좀 이상한 가구다. 손도 대지 않을, 월부로 구입한 스무 권짜리 작은 종이 가구. - P14

이렇게 독서의 길로 뛰어드는 그들은 언제까지나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그 길이 끝이 없음을 알고 기뻐한다. 기쁨과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그들은 출발점에, 첫경험에 집착한다.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경험이다. 그들은 언제나 그 지점에 머무르며 삶이 다해가는 순간까지 책을 읽는다. 고독을 발견했던, 그러니까 언어들의고독과 영혼들의 고독을 발견했던 첫 경험의 언저리에 머문다. 그들은 황홀감에 취해 세상에서 물러나 이고독을 향해 간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고독의 골은 깊어진다. 더 많이 읽을수록 아는 건 점점 더 적어진다. 이 사람들이 작가와 서점 출판사, 인쇄소를 먹여 살린다. - P15

돈이 있는 사람들의 흰 손이 있고, 몽상하는 사람들의 섬세한 손이 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에는 손이라고는 아예 없는 사람들, 황금도 잉크도 박탈당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글을 쓰는 것이다. 오직 그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요컨대 타자를 지향하는 글이 아니라면 흥미로운 글일 수 없다. 글쓰기는 분열된세상과 끝장을 보기 위한 것이며, 계급체제에 등을 돌림으로써 건드릴 수 없는 것들을 건드리기 위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결코 읽지 않을 한 권의 책을 바로 그들에게 바치기 위해서이다. - P17

실패한 자살이 모두 그렇듯 당신의 자살도 성공을 거둔 것이다. 당신이 잃은 건 생명보다 더한것이었다. 말, 투명한 말의 맛, 참된 말에 대한 사랑, 그모두를 잃은 것이다. 말 앞에서 당신은 먹을 것을 앞에둔 아픈 아이 같았었다. 그런데 릴케가 당신에게 먹을것을 다시 준다. 한 편의 시, 이어지는 또 한 편의 시, 한편의 이미지, 또 한 편의 이미지. 헐벗은 말과 함께 온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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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어?"
어린 시절 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 말 자체가 너무 거슬렸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닐수가 있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싶었다. 숫자 0처럼, 자연수도 아니고, 완전수도 아니며, 이성적이지도 실질적이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하지만 완전수 전체에 더해진 중립적인 요소? 안타깝게도 이조차 아닌 것 같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될 때 필요한 존재가 되는 일에서 해방될 것이다. 만일 지금내가 필요한 존재라도 된다면 말이다. - P164

나는 아직도 그장면들을 마치 호퍼의 그림처럼 떠올릴 수 있다. 유년 시절그 집에 관한 모든 기억은 호퍼의 그림처럼 불가사의하고 질척한 외로움으로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어질러진 침대, 앙상한 의자 위에 널브러진 책들 사이에서 창밖을 내다보거나 말끔히 정리된 책상 옆에 앉아 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들과 마찬가지 모습을 한 내가 그 가운데에 있었다. 집에서는 모든 것이 속삭임으로 해결되었고, 가장 분명하게 들리는소음은 내가 바이올린으로 연음을 연습할 때를 제외하고는 어머니가 외출을 위해 굽 높은 구두를 신을 때였다. 그리고 호퍼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에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면 나는 글을 쓴다. 나는 그림을 볼 수 있지만 그릴 수는 없기때문이다. 나는 항상 호퍼처럼 광경을 본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창문 혹은 문을 통해서 말이다. 또한 몰랐던 것을 결국에는알게 된다. 알 수 없는 것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럼 그것이진실이 된다. 당신은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리라고 믿어. - P219

다들 내 능력이놀랍다고 말했다. 저런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일들중 하나였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확실히 나는 언어를 쉽게 배우는 편이었다. 프랑스어는 식은 죽 먹기였고, 이탈리아어는 비록 억양이 틀리기는 해도 읽을 수 있고 제2의 모국어와 다름없이 구사했다. 카탈루냐어와 카스티야어는 물론 『갈리아 전기』수준의 라틴어도 막힘이 없었다. 러시아어나 아람어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내 방에 들어와 꿈도 꾸지말라고 말했다. 이미 아는 언어만으로도 충분해. 인생에서 다른 것들도 해야지 언제까지 앵무새처럼 언어만 배울 거니.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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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의사고 신부고 뭐고, 너는 더이상 왈가왈부할 필요없이 위대한 인문학자가 될 거야."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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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사람들을 무척 좋아했는데(얼마나좋아했는지 모른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들 머릿속에 들어있는 문장들이 간절히 듣고 싶었으니까.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내가 그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문장의 형태에 반응할 때면 내 문장들도 풍요로워지고 자유로워진다. 생각은 풍부한 표현으로 넘치고, 감정들은명확해지고, 다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진다. 내게 곧바로 반응해주는 누군가의 지성이 있는 곳에서 내 지성이 작동하는 소리만큼 나를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 P169

자기한테 시간이 없다고요. 하지만 사실은 이런 거죠. 그 사람이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자기가 그저 가끔씩만 관계를 맺는 학생들, 동료 교수들, 학과장들 같은 사람들이랑 항상 얘기를 나누는 듯한 기분에서 매일매일 회복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게교수들 대부분이 시간이 없는 이유예요. 오직 교수들만 그 사실을 모르죠. 그걸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불행한 거고요.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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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다시 이야기가 끝나는 방식에 관해 생각해 볼 기회다. 무엇이 이야기가 끝나는 것을 허락할까? 끝날 수도 있는 자리를 지나가 버리면 계속해서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
단편 형식의 극단적 효율을 고려할 때 남은 페이지들이 비본질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점점 늘어나는, 동시에 계속 잊지 말고 불신해야 하는 소설의 보편적 법칙 목록("구체적이어야 한다!‘, ‘효율을 존중하라!‘)에 다음을 덧붙일 수도 있다. 늘 확장하라. 사실 그게 이야기의 전부다. 지속적 확장 체계. 산문의 한 구획은 이야기가 (여전히) 확장하고 있다는 느낌에 기여하는 만큼만 이야기에서 자기 자리를 얻는다. - P243

우리가 어떻게 알까? 이미 말한 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독자가 우리와 거의 똑같이 읽는다고 가정하고 우리가쓴 이야기를 읽어보는 것이다. 우리가 지루하면 독자도 지루하다. 약간 기쁨이 터져 나오면 독자도 기분이 좋아진다.
표면적으로는 괴상한 가정이다. 독서 클럽이나 창작 워크숍을 통해 사람들이 똑같이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사람들은 가끔 모두 동시에 입을 떡 벌린다. - P259

이상한 방식이지만 그게 기술의 전부다. 마치 앞에 있는 산문(이미백만 번은 읽었을 것이다)이 자신에게 완전히 새로운 글인 양 읽기시작하는 자신을 합리적으로 체현하는 상태로 빠져드는 것. 우리가텍스트의 한 구획을 이런 식으로 경험하면서 우리의 반응을 살피고그에 따라 바꿀 때, 독자의 눈에는 노력의 증거로 보인다(처음 읽는독자도 작가가 살려둔 문장 뒤에 노력이 덜 들어간 다른 형태의 수많은 문장이 있음을 직관적으로 안다고 말할 수도 있다.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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