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저벨이 공장의 육중한 뒷문을 당겨 열자, 감사하게도 기준과 접착제의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기계실을 지날 때는 철커덕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으며, 윙윙거리는 엘리베이터는 그녀를 위층으로 데려가 사무실 바깥의 조용한 복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화장실에 들러 립스틱을 고쳐 바르고 머리를 빗었다. 이런 일들을 하면서 한동안은 책을 읽지 않을 거라고, 굳이 다른사람의 슬픔을 머릿속에 밀어넣지 않아도 삶은 충분히 힘들다고 - P204
딸이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나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애초에 생각한 것보다 사태가 더 암담하다는 사실을 이저벨이 처음절감한 것은 그때였다. 소녀가 엄마가 하는 말에 말없이 역겹다.는 표정만 번득였을 때, 이저벨이 단박에 우월감이라고 알아챈그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을 때, 이저벨은 나쁜 일이 일어날것 같은 조짐에 휩쓸리며 어질어질 멀미가 났다. 여기까지 그녀를 지탱해온 차분함이 이제 사라지기 시작했다. - P287
에이미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이며, 엄마가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이,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것이 마냥 기쁘다. 아이는 행복해서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고, 분홍색 잇몸에 하얀 조약돌처럼 박힌 앙증맞은 치아를 드러내며 조그맣고 촉촉한 입으로 활짝 웃는다.이저벨이 눈을 감자 복장뼈 한복판에서 익숙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시절에 그녀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지 않았던가? 그때는 그랬다. - P35
남자와의 관계에서는 똑같은 모순이 반복될 수밖에 없나봐. 어떤 때 보면 저 재수 없는 대답까지 똑같지 뭐야.‘ - P322
그녀는 도망가거나 신분을 바꾸거나 머나먼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살을 생각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비록 리노 같은 아들이 자신의 몸에서태어났고 그를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진저리를 치기는 했지만 말이다.릴라가 바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 P17
릴리는 말 그대로 증발하기를 원했다. 그녀를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뿔뿔이 흩어져서 그녀에 대한 그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릴라를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잘 알고 있다고믿기 때문에, 그녀가 이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남기지 않고사라지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 P18
나는 릴라가 나폴리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는데도 어린 시절부터 이미 이 모든 이치를 다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릴라에게 인정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마치자마자 부끄럽게느껴졌다. 내 말에서 노인네 특유의 고약한 염세주의가 느껴졌다. - P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