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 눈이 가늘어지며 심장이 식어가는 걸 느꼈다. 처음으로-그러나 마지막은 아니었다ㅡ남자들은 나와는다른 종이라는 자각을 했다. 철저히 분리된 이질적인종 나와 내 연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얇은 막 같은 게드리워진 것만 같았다. 욕망이 침투할 만큼 성기되, 인간적유대는 어룽거리게 보일 만큼 불투명한 막 내겐 그 막너머에 있는 사람이 현실 같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그런것 같았다. …(중 략)…
나를 사랑한다면서도 자기가 인격체라고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이 내게도 필요하다는 사실은 납득하지 못하는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그 막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 P38

우정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하나는 서로에게 활기를불어넣는 관계고, 다른 하나는 활기가 있어야만 같이 있을수 있는 관계다. 전자는 함께할 자리를 미리 마련해두지만, 후자는 일정 중에 빈 자릴 찾는다.
전에는 이런 구분을 일대일 관계의 문제라고생각했었다. 요즘은 그렇다기보다 기질 문제라는 생각이든다. 그러니까 내 말은, 기질적으로 활기가 샘솟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게 일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다. 활기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표출하고 싶어 안달이지만, 그런 게 일인 사람은 쉽게 울적해진다. - P44

"나는 사는 게 적성에 안 맞아" 내가 말한다.
"누군들 맞겠어?" 그는 내 쪽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대꾸한다. - P48

놀라운 통찰이었다. 나는 몽상이 그간 내게 무슨 일을해주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무슨 짓을 해왔는지도기억할 수 있는 시점 이후로 평생, 나는 내가 무언가를원하는 상태라는 게 들통날까봐 두려웠다. 원하는일을 하면 기대에 못미칠게 분명했고, 알고 지내고싶은 사람들을 따라가봤자 거절당할 게 뻔했으며, 암만매력적으로 보이게 꾸며봤자 그저 평범해 보일 것이었다. 계속 움츠러들던 영혼은 그렇게 손상된 자아를 둘러싼 - P164

모습으로 굳어져버렸다. 나는 일에 몰두했지만 마지못해그럴 뿐이었고,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해 한 걸음다가서는 일은 있어도 두 걸음을 옮긴 적은 없었으며, 화장은 했지만 옷은 되는대로 입었다. 그 모든 일 중 무엇하나라도 잘해낸다는 건 별생각 없이 삶과 관계 맺는일, 다시 말해 내 두려움을 사랑했던 것 이상으로 삶을사랑하는 일이었을 텐데,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줄 모르는일이었다. 내가 확실히 할 줄 아는 건 몽상으로 세월흘려보내기였다. 그저 ‘상황‘이 달라져서 나도 달라지기를간절히 바라고만 있는 것.
예순이 된다는 건 앞으로 살날이 여섯 달 남았다는시한부 선고를 듣는 것과 비슷했다. 내일이라는 몽상속피난처로 숨어드는 것도 하룻밤 새 옛일이 되어버렸다. - P165

내게 없어선 안 되는 게 있다면, 바로 그 목소리들이다. 전 세계 도시란 도시에는 골목 돌길이며 허물어진 교회유적이 된 건축물마다 민중이 심겨 있다. 하나같이 몇백년 동안 한 번도 파헤쳐진 적 없이 그저 켜켜이 포개어올려진 것들, 뉴욕에서 나고 자란 이의 삶이라는 건구조물이 아니라 이 목소리들 그 어떤 목소리도 다른목소리를 밀어내지 않고층층이 쌓인 무수한 목소리-을다루는 고고학과도 같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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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당장 다시 만나고 싶은마음뿐이지만-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다보면 얄궂게 비꼬는 말과 부정적인 판단으로 가득했던저녁의 여파가 밀려드는 게 온몸에서 살갗으로 느껴지기시작한다. 심각한 상처도 아니고 고작 살짝 긁힌 생채기가느다란 바늘 천 개가 팔이며 목이며 가슴을 콕콕찔러대는 느낌 정도이지만 내 안의 어딘가, 이름조차붙일 수 없는 한구석은 머지않아 또 그런 걸 느낄 생각에움츠러들기 시작한다.
하루가 지난다. 그리고 또 하루 레너드한테 전화해야지, 다짐해보지만 몇 번이고 손을 전화기로뻗으려다가도 그만두고 만다. 물론 레너드도 똑같은심정이겠지, 전화가 안 오는 걸 보면, 행동이 되지 못한충동은 차곡차곡 쌓여 신경을 망가트리고, 망가진 신경은굳어져 권태가 된다. 복잡한 감정과 망가진 신경, 그리고마비된 의지까지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면, 그제야 만나고싶은 마음이 다시 초조하게 올라오고 전화기를 향해 뻗는손은 마침내 동작을 완료한다. 레너드와 내가 서로를절친이라 생각하는 건 이런 주기가 일주일이면 돌아오기때문이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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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랜드는 표준 중국어 어학 강좌에 등록했다. 성조 때문에 교사의 도움 없이는 배우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도 있어서 어려움의 화신인 언어였다. 음반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직접 발음하고 또 발음하며 계속 교정을 받아야 했다. 그는 한 글자 한글자, 성조 하나 하나 읽기 시작했다. 하루에 열 개씩 배운다 쳐도1천 자를 공부하려면 석 달 이상이 걸렸다. 비이성적이고 정신 나간 일이지만 몰락과 사라지는 시간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는 광기를 느끼고 그 광기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종양이 자라는 뇌는 그가 불굴의 의지, 단어 영역에서 모든 장애물을 넘어서는 집중력, 숙련된 기억력으로 무장하고 맞서는 적이었다. 범죄자이자 독재자, 악령이었다. 2주 후, 아침 여명에 찌르는 두통을 느끼며 그는결국 중국어를 포기했다. - P93

두 사람은 에스파냐어 ‘펠리시다드 felicidad‘가 그 시기의 행복에어울리는 유일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어 ‘펠리치타Felicita‘는? 너무 현란하고 깊이가 없었다. 사탕 색깔이나 싸구려 젤라토같은 울림이었다. 프랑스어 ‘보뇌르Bonheur‘는? 너무 평평하고 너무 들척지근하고, 향수를 슬쩍 뿌린 것 같았다. 그럼 영어 ‘해피니스Happiness‘? 귀엽고, 레이랜드 집에 있는 장식품을 떠올리게 했다. 독일어 ‘글뤼크 Glück‘는? 유행가 제목 때문에 돌이킬 수 없이유치해졌다. 그러니까 에스파냐어가 정확하게 어울렸다. 끝의 드미는 거의 영어 ‘th‘처럼 발음해야 했다. 레이랜드와 리비아는 단어에서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었다. 두 사람은 자기들만의 울림과 의미 공간에, 타인에게는 닫혀 있는 지극히 사적인공간에 산다는 생각도 가끔 했다. - P156

입하는 걸까?" "그런데 단어들에 관한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가불현듯, 솨솨 소리를 내는 바다에 대고 네 아버지가 나더러 결혼하겠냐고 물었지." 리비아가 말했다. "아무 맥락도 없이, 목소리도높이지 않고, 날 바라보지도 않고 정말 지나가는 말처럼 묻더라. 처음에는 영어로, 그다음에 이탈리아어로" - P157

이런 음색은 시간을 바꾸는 능력이 있었다. 불현듯 시간은 언어들이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며 줄지어 맞추어 들어가야 하는 외적인틀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시간은 안드레이의 문장에서 솟아났고, 그의 언어가 시간을 만들어내고 흐르게 했다. 적어도 낭독하는 동안 그는 시간의 창조자이자 주인이었으므로,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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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지하철의 밝은 신호음은 빛바랜 추억이나 환각 또는 순수한 상상 속 일화 같았다. 번역을 하면서 알맞은 단어를 부단히 찾을 때만 현실감이 흐려지지 않고 온전했다. 오로지 그때만 모든것이 괜찮았고 완벽한 현재였다. - P10

이제까지 중요한 것은 언어였다. 모든 것은 이름이 불리고 이야기된후에야 실제로 존재했다.레이랜드가 찾아 나선 게 아니라 그게그에게 와서 부딪쳤다. 처음부터 그랬다. 언어 없이 사물에 도달하기를, 사물과 사람과 감정과 꿈에 닿기를 원할 때도 자주 있었지만 언제나 그 사이에 언어가 다시 끼어들었다. 언어로 이해해야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할 때면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리비아와의 경우에만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 P21

세월이 지난 후에 아내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집중하는 방식은 그를 사로잡고 불길에 휩싸이게 했다. 20년이 지나도마찬가지였다. 트리에스테 집에서 둘은 계단 제일 위쪽 층계에 앉아 단어와 그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그걸 독일어와 영어,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가끔은 트리에스테 사투리로 어떻게 번역해야하는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워런 숀의 침실에서 왔다갔다 걸으며 톰 커트니의 문장을 허공에 대고 말하는 지금도 그는 그때계단에서처럼 자신의 언어를 나눔으로써 삶을 함께하던 리비아 - P23

온갖 단어와 책을 향한 시위였을까? 구체적인 일과 구체적인고통, 피와 상처가 충분히 언급되지 않는 세상을 향한 시위? 그렇게 나갈 때면 딸은 집 뒤쪽의 높다란 삼나무에 여러 번 오르락내리락했는데, 마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려는 것 같았다. 단어에헌신하는 것 말고 다른 삶도 있다고. 지극히 생생하고 강력한 삶, 근육과 행동하는 손과 송진 냄새가 있는 삶, 얼굴에 바람이 불어오고 무릎이 생채기투성이인 삶, - P31

언어적 상징만 정신의신비인 게 아니라, 어떤 장면과 감정을 수십 년 이상 유지하는 능력 또한 못지않은 수수께끼였다. 마늘과 세제 냄새가 기억났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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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그녀는 모든 사람이 엄마와아빠 중 한 명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알 만큼은 영리해졌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어쩌면 미국에 갈 때마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엄마의 불행한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사라지고 난 이후 그녀에게 생긴 커다란 구멍처럼 엄마에게도 메워지지 않는 구멍이 생겼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그녀는 엄마가 한순간 잘못된선택을 했지만 실은 그녀를 떠난 것을 후회하고 있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엄마 역시 선택을 했다는 것이, 그 선택의 순간에 그녀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과달리 엄마는 자식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것이 그녀에게 명확해졌다. 그녀는 열네 살의 여름방학을 끝으로 더이상 미국에 가지않기로 결심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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