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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하스 의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1월
평점 :
에쿠니 가오리는 196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청아한 문체와 세련된 감성 화법으로 사랑받는 작가로 일본 문학 최고의 감성 작가로 불리기도 하는 그녀는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도쿄 타워』,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좌안 1·2』, 『수박 향기』 등 많은 작품으로 일본뿐 아닌 한국에서도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작가이다.
취향.
나는 잘 모르겠다. 아마 동생 말이 옳으리라. 애인의 모습 외에는 전부 내 취향에 맞지 않는 듯하다.
애인을 만나기 전에도,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있을 텐데.
모든 것이 너무 멀어서, 마치 타인의 기억 같다. 이 역시 내가 갇혀있는 탓이다. 나는 갑자기 두려워진다. 그래서 다음에 애인을 만나면 꼭 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어딘가에 가둘 거면, 그곳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게 해 줘야 한다고, 자유 따위는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p.132)
웨하스 의자 주인공은 중년의 독신으로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애인은 있는 직업여성이다. 애인도 있고 자기 일도 있는 멋진 커리어 우먼 이야기인가? 제목이 웨하스 의자인 걸 보면 그런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무너져가는 것을 그린 글일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책장을 넘기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글귀가 있다.
"나는 자신이 홍차 잔에 곁들여진 각설탕 같다."
이 문장이 나온 이후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어떤 사람이기에 서로 좋아하는 애인 사이인데 자신을 홍차 없이는 의미 없는 각설탕에 비유했을까? 앞부분엔 꽁냥꽁냥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그런 의문은 글 중반에 풀린다. 그녀의 애인은 부인도 딸도 있는 유부남이다. 요즘 흔히 말하는 '내로 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야기 장편소설이다. 소설과 영화, 드라마 주제로 많이 쓰이고 있는 불륜 이야기는 듣기 좋고, 보기 좋은 소재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다는 것은 작가 에쿠나 가오리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초점을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여자 주인공의 심리에 맞춰 어떤 날은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애인의 사랑이란 울타리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로. 또 다른 날은 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자신의 절망을 벗어던지기 위해 애인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 성인으로. 차라리 아이처럼 생떼 부리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심리가 절절히 묘사되어 있다. 결단을 내릴 사람은 자신뿐이란 걸 알기에 더욱 고뇌가 깊어가고, 그런 생각들이 쌓이지만 애인이 집을 찾아와 꽉 안아주면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생활의 반복. 이 갑갑함을 벗어던지고자 마지막에 주인공은 결단을 내린다.
"우리 헤어지자."
마지막까지 애인은 "괜찮아."라고 말한다.
뭐가 괜찮은 것일까? 여자 주인공 입장에서도 독자 입장에서도 하나도 괜찮을 것이 없는데...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내가 있는 장소로, 있어도 좋다고 말해 주는 장소로,(p.241)
그렇게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며 끝난다.
내가 있어야 할 장소? 있어도 좋다고 말해 주는 장소? 둘만의 이야기로 철저히 여자 주인공 입장에서 쓴 소설이다.
책 제목 웨하스 의자처럼 조그맣고, 예쁜 그러나 아무도 앉을 수 없는 의자는 주인공에게 행복을 상징했다. 눈앞에 있지만 당연히 의자지만 절대 앉을 수 없는 그런 행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