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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아이즈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엄지영 옮김 / 창비 / 2021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켄투키를 ‘소유’하는 이와 켄투기가 ‘되기’를 선택하는 이. 켄투키가 ‘된’ 자들은 ‘소유’한 이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이 책에서 보여주는 세계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털을 날리지도 않고, 먹을 것을 챙겨줄 필요도 없는 데다 그럭저럭 귀여운 외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반려동물 대신에 켄투키를 선택한다. 혹은 내 아이를 돌볼 수 있고 또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존재로서.
그 정도의 이유로 켄투키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대를 내 일상으로 끌어들일 수가 있나. 게다가 켄투키를 ‘소유’한 이는 ‘조종’하는 이에 대한 정보 값이 전혀 없다. 켄투키와 단순히 반려동물에게 느끼는 애정과 유대감을 형성하기에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켄투키 너머의 존재는 어찌됐든 인간이다. 서로가 서로를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어떤 특정 대상에게 악의를 품고 범죄를 저지르는 일은 방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은 꼭 어떤 특정인에 대한 증오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호기심, 그저 흥미를 돋운다는 이유로 죄를 행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익명성 뒤에 숨어 평소 드러내지 못했던 추악함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러한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지, 아니 고려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켄투키를 ‘소유’하고 만다.
켄투키가 있는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켄투키의 자유를 갈망하는 ‘켄투키 해방 운동 단체’가 등장한다. 켄투키를 ‘조종’하는 이들은 켄투키가 아닌 그 외부에서 켄투키가 있는 상황을 그저 태블릿으로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자유를 원한다면 켄투키의 연결을 끊어버리면 그만이지 않나. 솜 덩어리를 입은 로봇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켄투키에게 사람들은 너무나도 과도하게 묶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켄투키를 ‘조종’하는 이는, 이제 ‘조종자’가 아닌 정말로 켄투키가 ‘된’다. 태블릿 너머에서 켄투키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마르빈은 내가 굴러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이 과도하게 켄투키에게 이입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 켄투키의 눈을 통해 본 또 다른 삶 때문인가. 나와 켄투키의 존재가 분리되지 않고 두 존재 모두 나로서 인식하기 때문에 연결을 끊어버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걸까.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해왔지만, 사실 책을 읽으며 켄투키의 존재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소유자’는 자신과 함께하는 켄투키를 향해 애정을 표현하고, ‘조종자’는 ‘소유자’의 삶을 지켜보며 애정을 느낀다. 에밀리아와 에바의 일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면 이 켄투키의 존재도 이해 못 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세계의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켄투키를 ‘소유’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이 책을 공포로 분류하는 까닭을 여기에서 어렴풋이 느꼈다.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존재를 나는 어느새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고, 어쩌면 사랑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작가는 내가 느꼈던 일말의 감정들이 모두 산산조각냈다. 이 섬뜩한 존재를 정말로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