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
윤신영 지음 / Mid(엠아이디)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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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박쥐에게..
박쥐가 꿀벌에게..
꿀벌이 호랑이에게..
까치가 남긴 쪽지..
돼지가 고래에게..
고래가 비둘기에게..
비둘기가 십자매에게..
십자매가 공룡에게..
버펄로가 세렝게티의 사자와 동료들에게..
사자가 네안데르탈인에게..
네안데르탈인이 인류에게..

어쩜 조금은 생쭝맞고.. 어쩜 조금은 의아하고.. 연관성이 전혀 없는가 생각하다가도 내가 모르는 연결고리가 있는가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고.. 최근 새로 출간된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 를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이다. 다양한 종들에게 서간체로 이어간 전개도 새로웠지만 제목의 타이틀을 장식한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더 자극을 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한 이야기 일까?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일까?

그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범주에서만 내 만족에 책을 꺼내들었다는 말이 어쩜 제일 잘 맞을 지도 모르겠다. 책을 펼쳐 들었을 때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 하지만 어느 순간 주변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것들이 하나씩 보여지며 그들의 진화와 생활에 대한 이야기와 내가 유년 시절 겪어왔던 이야기들이 겹쳐지며 순간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전철안에서 휴지를 꺼내들었던 적도 있었으니 나 역시 그들에게 너무도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인간이 박쥐에게...
시골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내게는 박쥐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추억이 있었다. 물론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온통.. 모두.. 완전히 잊고 지내고 있었다. 중학교 들어갈 즈음 남자 중학교 인원이 많아져 원래 있던 학교에서 분리를 해 새로 학교를 지었는데 하필 그 위치가 공동묘지의 한 부분을 밀어 학교를 지은 터라.. 미리 오랜시간 공고도 하고 이장도 하였지만 무연고 묘도 많았었고, 제대로 묘 정리가 안되었던 곳도 있었기에 학생들이 운동장 풀뽑기 등 정리를 하다보면 가끔 뼈가 발견되기도 하곤 했었다. 그보다 더 뜨악~했던 일은 밤이면 운동장 가득 날아다니는 검은 생명체... 바로 박쥐들이 해 떨어진 운동장을 가득 메운채 이상한 소리도 내며 날아다니며 운동 삼아 운동장을 걷던 사람들 머리위로 부딪힐 듯 날아다니던 기억이 아직 새록한데.. <사라져가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를 보며 그때의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박쥐 하면 "드라큘라"와 연관지어 생각을 하고, 어느 영화에서나 잠시 다뤄질 때 무용담처럼 그때의 이야기를 떠올리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시골에 가도 어느 순간부터인지 운동장 가득 날아다니던 박쥐가 보이지 않았는데도 그냥 무심히 지나쳐버렸었다. 책에서 처럼 박쥐나 돌고래, 고래 등 주파수를 이용해 교신을 주고 받는다든지, 해충을 사냥하기 때문에 전해지는 이야기 보다 사람에게 유익한 동물이라는 이야기는 학창 시절 과학시간을 통해 귀동냥으로 주어듣는 정도의 지식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날개나 송신장치를 위한 변이가 왜 필요했었는지, 근래 들어 이유없는 떼죽음이라든가, 원인 모를 집단 폐사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가쉽정도의 이야기로만 치부하고 그냥 지나쳤던 것 같다.

박쥐가 꿀벌에게..
그렇게 과거의 기억을 조금씩 떠올릴 즈음 박쥐가 꿀벌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다른 어느 파트보다 울컥~하며 글을 읽었던 것 같다. 한눈에 봐도 귀욤~귀욤~ 귀요미 꿀벌의 패션부터 부지런함.. 모든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또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소일풀이로 잠시 양봉을 하신 적도 있었기에 꿀벌은 다른 생물들 보다 거부감은 덜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꿀벌이 그저 친근하고 귀엽고 예쁘기만 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동생이 벌에 쐬어 죽을 고비를 넘기는 현장을 고스란히 지켜봤기에 그에 대한 두려움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여러모로 사람에게 좋은 점만 보여주고 있는 꿀벌로 기억되고 있었는데.. 꿀벌 역시.. 특히 동양꿀벌이 바이러스성 유행병인 "낭충봉아부패병"에 의해 75%~77%에 해당하는 수가 집단폐사되었다는, 한국토봉협회에서는 98%가 폐사했다는 글을 읽을 때는, 나도 모르게 울컥~ 해 버렸다. 웬지 나의 어릴 적 추억을 장식해주고 있는 박쥐도 꿀벌도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아카시아가 만발해 일벌들이 한창 꿀과 꽃가루를 따러 갈 때인데, 통 나가질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잘 보니, 일은 안하고 애벌레를 내다 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벌이 새끼를 끄집어내는 소리는 이어졌습니다. 멀리 날아가려다가 주저 않고, 다시 기운을 내 애벌레를 안고 숲으로 날아갔습니다. 돌아오는 일벌의 날개짓은 아카시아 꽃꿀을 가득 발견하고 기쁨에 겨워 추던 춤과는 전혀 다른 몸짓입니다. 저는 가만히, 날개막을 펼쳐 제 커다란 귀를 막았습니다. 그래도 벌들의 통곡 소리는 들려왔습니다."
"~당신의 통곡소리마저 그리워질 거라 생각하니, 당신이 처한 비극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아마도 가장 친근하게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꿀벌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더 애정이 쌓이고, 더 감정이 실렸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글로 남기는 이 순간에도 다시 울컥~하게 감정이 밀려든다.

꿀벌이 호랑이에게..
어린 시절 "호랑이와 곶감"이야기를 들으며, 은혜갚은 호랑이의 보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 어릴 적에 진짜 호랑이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랄 때만 해도 우리나라 백두산 호랑이는 이마에 "王"자가 새겨진 거라며 더 특별하게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보며 한국호랑이가 아니라 러시아 아무르강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었기에 "아무르 호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실 아무르 호랑이가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베리아 호랑이나 백두산 호랑이와 다른 종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에서 꿀벌이 호랑이에게 비슷한 몸 무늬를 가지고 있다며 친근함을 표할 때는 나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흘려버렸었다. 어쨋든 호랑이가 왜 우리나라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호렵과 구한말의 호랑이사냥, 벌목에 의한 서식지 파괴 등 인간들이 다른 동물들의 대상으로 저지른 많은 만행에 나도 모르게 두손을 모으게 되었다. 그러다 수취인불명으로 반송되었다는 글에서 제대로 포텐이 터져 휴지를 꺼내 들어야 했었다.

까치가 남긴 쪽지
어린 시절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온다며 좋아 했었는데.. 어느 순간 우리나라에서 까치가 "유해동물"로 지정되고 보이는 횟수도 자꾸 줄어들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 같다. 나 역시 사무실 주변에 숲이 있기에 가끔 까치가 찾아드니 남들보다는 까치를 자주 보는 축에 속하지만, 사실 매년 나무에 둥지를 짓고 새끼를 품던 모습이 어느 핸가 부터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나 역시 놓치고 있었다. 예전엔 까치는 길조, 까마귀는 흉조라며 까치가 대우받던 시절도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까치보다 까마귀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이 더 좋아져 있었다. 내 나름의 생각으론 일본 여행이 개방된 점도 무시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일본여행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크기의 까마귀를 효도하는 새(사실 그러하지만)라며 대우하는 일본의 문화가 우리에게 젖어들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쨋든 까치 역시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개체였었는데, 그 익숙함에 주위에서 사라져 가는 것 조차 인지되지 않는다면 너무 슬픈일이 아닐 까 생각해 본다.

돼지가 고래에게..
돼지나 소에 대해서는 그저 집에서 기르는 가축 중 하나라고 생각해오다가 몇 해전 구제역으로 집단매장 당하는 모습이 매스컴을 통해 생생하게 중계될 때, 하필 어린 돼지들이 어미를 향해 '꽤엑~꽤액~' 소리를 지르며 구덩이 속으로 떠밀려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울컥~ 하며 너무 슬픈 마음 한켠으로 그들 모두가 사라져 버리지 않을 까 걱정이 앞섰던 기억이 난다. 그런 돼지가 대양을 꿈꾸는 고래를 향해 걱정 섞인 안부의 편지를 전하다니 조금은 아이러니한 감정이 앞섰다. 모비딕에서의 공포와 경외감을.. 프리윌리에서의 친근함과 다정다감함을.. 그 모든 다양한 감정을 전해주던 고래가 남획과 혼획을 앞세운 사람들에 의해 사라져 가고 있다니 웬지 서글프다. 일부러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해 다가오지 않는다는 글을 어디선가도 읽은 적이 있는데.. 대양을 지나는 배를 향해 장난 치듯 다가오는 고래와 돌고래가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사라져가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에서도 바다 속 미생물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기회를 주고 있다는데, 우리는 그런 그들에게 또다른 방법으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고래가 비둘기에게..
어린 시절 집에서 키우던 비둘기가 낮에는 어디론가 날아갔다가 해질 무렵이면 되돌아오곤 했었는데.. 어느 핸가 집을 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었다. 어머니는 자꾸 새를 풀어놔서 산으로 도망가게 했다며 아버지에게 핀잔을 던지고는 그냥 그렇게 잊혀졌었다. 그 시절에는 집에서 비둘기를 키우는 집도 종종 있었고, TV화면 가득 남산공원을 날아오르던 비둘기를 보며 '누구네 비둘기일까'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말이다. 지금은 집에서 비둘기를 키우는 집은 볼 수 가 없다. 그렇게 성인이 되어 서울로 왔을 때, 도로변 주변에 가득 모여있는 비둘기 떼를 보며 신기하기도.. 조금은 의아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동물에 대해 별 거부감이 없는 나는 새를 날리며 좋아하는데 친구들은 입을 막고 머리를 털며 피하기 바빴었고, 비둘기를 날린 나에게 핀잔아닌 핀잔을 던지곤 하여 그 뒤로 그런 행동을 멈추었었다. 살이 잔뜩 오른 비둘기에게는 '닭둘기'라는 또다른 칭호로 불렀던 일도.. 사람이 다가가도 피하지 않고 걸어서 피하는 비둘기를 보며 '이젠 닭둘기를 넘어 구랭이가 될려고 한다'며 핀잔을 하던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들 역시 사람에 의해 야생에서 집안으로, 다시 도심으로 버려지기를 반복해 지금의 그러한 생태계가 만들어졌다는데.. 사실 그들에게는 죄가 없는 것인데.. 원인과 결과가 바뀌어 타박 받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들의 붉은 눈이 그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안스러움으로 다가온다.

비둘기가 십자매에게..
참 오랫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애완용으로 십자매를 많이 기르던 때도 있었는데.. 언제부터 사라지게 된건지 나도 모르겠다. 조금 있는 집이라면 십자매 한마리씩을 키웠던 것 같다. 그저 노래잘하고 사람을 잘 따르던 작고 귀여운 새로 기억되는데.. 그들 역시 우리의 눈에서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래! 내 기억에서도 어느 새 사라져.. 아니 잊혀져 있었다. 그 멋진 이름마저 이제는 생소하게 들리니 말이다.

십자매가 공룡에게..
공룡은 어쩌면 가장 익숙하면서도 잊혀졌음을 인지하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크고 강한 육식 공룡들의 기억으로만 익숙한 우리에게 십자매가 공룡과의 흡사성, 변이를 말하며 자신과의 동기화를 주장하는게 조금은 의아하지만.. 공룡의 변화와 멸종에 대해서는 영화나 학술지를 통해 가장 많이 접하고 있고 또, 존재하지 않는 멸종된 개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십자매의 편지가 수취인불명으로 반송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고, 반송되었어도 그 때문에 꿀벌이나 고래에게서 느꼈던 그 슬픔을 조금은 잠재울 수 있었으니 되려 감사해야 할 일일까?

버팔로가 세렝게티의 사자와 동료들에게..
어릴 적 꿈의 낙원이었던 세렝게티.. 푸른 초원위에 많은 동물들이 뛰어노는 야생동물의 천국 세렝게티.. 그 세렝게티의 사자와 동료들에게 버팔로가 편지를 띄웠다. 본인들 역시 암사자에게 사냥을 당하며 쓰러지는 장면이 지금도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버팔로가 세렝게티의 사자들에게 편지를 띄웠다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동물의 원래 운명을 품을 그 곳으로.."

사실 버팔로가 세렝게티의 사자에게 자신을 좀 봐달라는 이야기를 전한 것은 아니다. 자연 그대로의 약육강식의 원칙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환경으로 돌려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야생동물의 천국이었던 세렝게티가 이제는 자연의 사파리로 사자와 동물들간의 약육강식이 인간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한 인간들의 장소가 만들어지면 자연스럽게 약육강식에 대응해 살던 많은 동물들에게 인공적인 스트레스가 가미되어 새로운 지역으로 진화되고 있음에 대한 경각심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사자가 네안데르탈인에게..
그리고... 네안데르탈인이 인류에게..

"저는 사라졌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신 안에 존재하며, 당신의 모든 발걸음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신합니다."
"주변을 둘러보세요. 그곳에서 당신과 생태계를 공유하는, 아니 당신과 같이 생태계를 완성해 가는 다른 동물이 있을 것입니다. 약하고 무용해 보이는 인류를 보듬고 품어 70억에 이르도록 번성시킨 당신의 포용력을, 이제 다른 종에게도 넓혀 보세요. 조금이지만 제게도 보여줬던 그 포용력을, 당신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존재로서, 다시 기다립니다."

사자가 네안데르탈인에게.. 다시 네안데르탈인이 인류에게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전하지만, 어쩜 버팔로가 세렝게티의 사자와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전할 때 이미 모든 동물들이 인류에게 하고 싶은 마음이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수없이 많이 사라져간 동물들의 원인 제공의 한 부분을 인류가 차지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인류가 그저 다른 생물들에게 폐해만 입히는 그런 존재만은 아니다. 지금 이순간도 알게모르게 진행되고 있는 많은 연구들이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에게 어떠한 식으로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진행되고 있고, 그 많은 연구와 연구원들의 노력이 존재하고 있는 한.. 미래가 그저 지나온 날들처럼 암울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노력을 믿고 싶다. 미래의 모든 생태계를 포용할 가장 큰 가능성이 인류에 의해 펼쳐질지 모른다는 기대감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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