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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뤽 아우프 : 독일로 간 광부
문영숙 지음 / 서울셀렉션 / 2015년 7월
평점 :

제목 : 글뤽아우프 독일로 간 광부
지은이:
저자 문영숙은 1953년 충남 서산 출생. 2004년 제2회 ‘푸른문학상’과 2005년 제6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2012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받았다. 잊지 말아야 할 우리 민족의 역사를 어린 독자들에게 알리는 소설을 주로 쓰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청소년 역사소설 《에네껜 아이들》, 《까레이스키, 끝없는 방랑》, 《독립운동가 최재형》, 장편동화 《무덤 속의 그림》, 《검은 바다》, 《궁녀 학이》, 《색동저고리》, 《아기가 된 할아버지》, 《개성빵》, 《벽란도의 비밀청자》 등이 있다. 장편소설 《꽃제비 영대》는 영문판 《Across the Tumen》으로도 출간되었다.
출처 :교보문고
http://book.naver.com/product/go.nhn?bid=9366905&cpName=kyobo&url=http%3A%2F%2Fwww.kyobobook.co.kr%2Fcooper%2Fredirect_over.jsp%3FLINK%3DNVB%26next_url%3Dhttp%3A%2F%2Fwww.kyobobook.co.kr%2Fproduct%2FdetailViewKor.laf%3FmallGb%3DKOR%26ejkGb%3DKOR%26linkClass%3D%26barcode%3D9788997639618
내용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난 주인공 소년이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거쳐 어렵게 공부하고 독일 탄광에 가서 일을 하고 거기서 독일인들의 선처로 대학까지 입학하게 되면서 주인공의 노력과 주변 사람들의 선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대사관 직원들의 악행 이야기도 잠깐 나옵니다.
p13
"아재! 저 , 여기 있어요. 아재! "
아저씨의 입술이 다시 힘겹게 움직였다.귀를 바짝 기울였다. 겨우 겨우 토막말이 이어져 나왔다.
"곡, 꼭 성공해서 ....꾸 꿈을 ....내 내몫까지 ....지"
- 이야기 첫 부분에 주인공을 이끌던 샘골 아재의 죽음이 나옵니다. 첫 부분에 탄광 사고로 인한 죽음을 이야기하고 뒤에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p33
아저씨가 돌아간 후부터 중학생이 되겠다는 꿈을 꾸기로 했다. 꿈을 꾸는 건 돈이 드는 일도 아니니까. 마음마저 가난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중학생 모자를 쓰고 신문배달을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게 나쁘지 않았다. 나무를 할 때도, 밭일을 할 때도, 심지어 그냥 길을 걸을 때도, 가슴속에 꿈이 있다는 게 꿈이 없을 때보다 훨씬 나 자신을 소중하게 느끼게 해줬다.
-샘골아재는 강제로 인민군에 끌려갔다가 탈출하던 와중에 죽을 고비에서 주인공 소년과 어머니에게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게 되는데 이 것을 인연으로 주인공 소년에게 도움을 주게 됩니다.
p37
"상우야, 꿈은 더 큰 꿈을 꾸기 위해 필요한 거야. 이 꿈을 이루면 또 다른 꿈이 보이거든, 노력해도 안 되면 할 수 없지만, 노력을 안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
-이 말은 아저씨가 된 지금도 신선한 말입니다. 꿈을 갖아야 한다....
p45
아저씨의 말을 들으니 서울로 올라오며 걸었던 실낱 같은 기대감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다.
"시골은 더한 것 같아요."
"그러게 말이다. 외환보유액이 1억 달러도 못 미쳐서 대한민국이 전 세계 꼴찌에서 두 번째로 가난하단다. 미국에서 해주던 무상원조도 중단되고."
- 독재정권에는 원조를 하지 않는다는 케네디 대통령 정책덕에 애꿎은 서민들만 힘들었지요.
p94
나는 이를 악물고 내가 정한 목표를 채웠다. 악착을 떨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한국 광부들은 모두 돈을 더 벌기 위해 목표를 높게 잡고 , 연장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성실과 억척으로 버티는 한국 광부들의 모습에 처음에 비웃던 독일 광부들로 달리 보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에 석탄가루로 범벅이 된 책을 꺼내 읽는 나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독일 광부들도 늘어났다.
-지금 우리나라에 와있는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중에 범죄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로 알고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일하고 일요일날 한강변에서 농구 대회를 하는 동남아시아 청년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참 보기 좋았습니다. 사람이 많다 보면 별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도 없고 무조건 호의를 베풀 필요도 없습니다. 과수원 독일 아저씨가 주인공 상우에게 했듯이 도움을 요청하고 성실한 사람을 궂이 피부색으로, 국적으로 차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p141
"사과따기가 끝나면 가게에서 일하게. 말을 배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거네."
"고맙습니다."
"헤르 박, 내게 고마워 할 필요 없어. 자네가 성실하지 않으면 우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네. 세상엔 무조건 도움을 주는 일은 없거든. 다 본인 하기 나름이지."
- '때리지 마세요' '월급 주세요'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라는 국내 외국인 노동자들의 절규가 부끄럽습니다.
p231
이튿날부터 아침을 먹자마자 아헨대학교로 달려갔다. 사범대학 학장실 앞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교수들과 학생들이 나를 흘낏거렸지만, 나는 남의 눈치를 볼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문득 나를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심부자네 대문 밖에서 밤을 꼴딱 새웠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p239
"관례가 없어서 우리도 어쩔 수가 없어요."
담당직원의 말에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없는 법도 만들어가며 입학허가를 해 주는 독일에 비해 무조건 안 된다는 한국대사관이 원망스러웠다.
-이야기 중에 대통령이 방문해서 함께 우는 장면이 부끄럽게도 대통령이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더군요. 근로계약기간 연장도 없었고, "독일에서 열심히 일하고 한국에 돌아오면 잘 살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내용의 이야기도 지켜지지 않았고요.
p258
일제는 36년 식민통치 기간 동안 우리나라에서 수많은 물자를 빼았아갔다. 가장 기본적인 쌀은 물론이고 광물, 산림,수산 자원에 문화재까지, 일본의 수탈로 인해 우리나라는 가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우리나라 곡창지대에서 나는 쌀을 일본 본토로 실어가기 위해 김제에서 군산까지 도로를 건설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아스팔트 포장도로였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 알았다. 해방이 된 후, 수탈의 현장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굶주림을 겪은 농민들이 원통한 마음에 그 도로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우리가 일제의 수탈로 얼마나 뼈져린 가난을 겪어야 했는지를 증명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일본 후소샤 교과서는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을 정당하고 합법적인 것이었으며 군위안부는 계약에 의한 상거래였다는 식으로 저술했다고 합니다. 이에 많은 우려가 있었는데 요즘 우리나라 일부 교과서를 요미우리신문이 칭찬하며 반기는 기사를 냈다고 하더군요. “일제시대를 경제발전의 관점에서 재평가”한 교과서가 있다고요. 그런 교과서를 만든 사람은 어떤 생각일까 궁금합니다. 누구를 위한 발전인지...
감상:
이 책이 실화를 바탕으로 써졌다는 것을 모르고 책 표지만 보고 영화 국제시장이랑 비슷한 내용이겠거니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읽는 내내 울컥 울컥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꼭 읽어보고 서로 이야기 해보자 했습니다.
꿈을 갖으라는 말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그리고 " 아... 그건 내알바 아니고 . 무조건 관행이 그래! "라고 얄밉게 말하는 대사관 직원들의 얼굴이 자꾸 상상이 가네요.
하단에에는 이 책의 실제 주인공인 권이종 박사님의 정보입니다.
권이종(權彛鐘, 1940년 10월 8일 ~ )는 대한민국의 전라북도 장수군 출신의 교육학자이다. 파독광부 출신으로 한국교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한국청소년개발원 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교원캠퍼스(www.teacher21.co.kr)원장이다.
학력
독일 아헨대 대학원 교육학 석사독일 아헨대 대학원 교육학 박사
약력
1964년 파독광부로 독일 메르크슈타인광산에 파견 3년간 근무1979년~1985년 전북대학교 교육학과 교수1985년~2006년 한국교원대학교 교육학과 교수한국청소년개발원 이사대통령자문 새교육공동체위원회 위원민주평통 자문위원한국청소년개발원 원장(2001.6~2004.6)현 ㈔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 부회장현 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현 교원캠퍼스(www.teacher21.co.kr)원장
생애
권이종 교수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파독 광부 2기’에 지원해 독일로 떠났다.,소 팔아 여비를 마련해준 가족에게 보답하고자 연장 근무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공부했다.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온 성실한 젊은이에게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독일에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1979년에 귀국해서는 전북대 교수가 됐고, 1985년부터 한국교원대에 재직하다 2006년 정년퇴직했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6%8C%EC%9D%B4%EC%A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