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미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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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고 슬픈 입장(入場), 렛미인

 

<노스페라투>에 뱀파이어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돌연변이나 괴물에 가까운, 잔인하거나 두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뱀파이어라는 생물이 다소 환상적이지만 그럼에도 인간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갖게 했고 새로운 장르의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와 그 연작)는 뱀파이어를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침내 1994년, 이 소설이 영화로 탈바꿈 되었을 때, 사람들은 뱀파이어에게 현혹되었다. 톰 크루즈가 우아한 몸짓으로 욕정을 드러낼 때, 브래드 피트가 욕망과 도덕 사이에서 고뇌할 때, 꼬마 숙녀 커스틴 던스트의 모습은 천진한 잔혹함을 드러낼 때 그들은 아름답고 고독하고 매혹적인 '환상' 그 자체였다. 그렇게 뱀파이어들은 '섹시함과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위치를 선점하고 말았다.

 

확실히 흡혈귀라는 존재는 매혹적인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다른 괴수나 유령들과 달리)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고, 여자를 유혹 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고 노련하며, 밤에만 다니는 특성상 창백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남자의 모습이라니. '밤 문화 즐기시는 남작청년' 정도로 인식되기 쉽지 않은가. '피' 가 지니는 원색적이고 오싹한 동시에 피학적인 쾌감, '목'이라는 가느다란 기관을 통해 이 '피를 빤다'는 -그것도 처녀의 피를 즐기는- 묘한 색정, 홀로 관에 들어가 수면을 얻는 연약함과 폐쇄성까지. 이토록 인간의 묘한 호기심과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는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소설과 영화에 '뱀파이어 열풍'이 부는 게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다.

 

그러나 뱀파이어를 향한 가장 음험한 시선, 즉 영생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갈망에 대해 회의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뱀파이어의 불멸은 죄악이자 고독이요 그들의 형벌이건만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동경한다. 영원히 계속되는 게임을 맞출 필요가 있을까, 삶이 끝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간이 충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닐까. 나 역시 뱀파이어에 대한 환상을 품어본 적은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받은 벌과 고독 때문이었지 동경 따위가 아니었다. 특히 점점 더 뱀파이어가 '유행'이 될수록 그에 대한 고민과 절망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팬시적이며 할리퀸 소설 같은 -특히 벨라 같은 캐릭터가 주인공인- <트와일라잇> 시리즈엔 역시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라고 입을 꾹 다문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치 '퇴색해버린 첫사랑'처럼 기억하고 있던 뱀파이어에 대해서 그야말로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영화 한 편이 쑥 나왔다. 차갑고 고독하고 아름답고 슬픈 영화, <렛미인>. 이 영화 한편이 이 리뷰를 쓰게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이 글은 어느 겨울, 내가 사랑에 빠진 어느 작품에 대한 애정의 러브레터인 것이다.

 

영화를 보며 떠올린 것은 김지운 감독의 <장화홍련>이었다. 이야기의 토양이나 이미지의 근원이 비슷한 느낌을 준다고 할까.찰나적인 아름다움, 죄책감과 고독, 그림 같은 배경과 그래서 더욱 커지는 비극, 고대 그리스의 비극과도 비슷한 어딘가 원초적인 괴로움, 파르르 떨리는 듯한 연약함과 무연함. 양쪽 모두 아이들은 고독하고 어른들은 무심하다. 무엇보다 공포의 온도가 비슷하다. 비극은 무거워야 하고, 슬픔은 깨끗해야하며 아름다움은 의연해야한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미의식과 주관에도 들어맞는 영화였다. 세상에는 그런 작품들이 있는 것 같다. 아름다워서 슬프고, 슬퍼서 아프고, 아파서 무서운. 지금 떠오르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악』과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 영화 <블라인드>와 <판의 미로>, <가위손>과 <장화홍련> 같은 것들. 하얀 눈이 흩날리는 첫 장면, 그리고 오스카르와 눈의 나라를 본 순간 <렛미인> 역시 같은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을 어쩔 수 없이 알았다(소설의 서문에 작가가 <장화홍련>을 언급한 것을 읽고 꽤 놀랐다. 비슷한 온도감을 가진 사람이구나 싶어 왠지 모를 동질감까지 들었다, 그는 <렛미인>의 겨울 <장화홍련>의 여름이라는 계절이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영화에 이토록 반했으니 원작이 번역되길 기다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책의 출간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갔다. 기대와 불안감을 각자 절반씩 안고 말이다.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화 한 영화들은 대부분 실패로 평가받는다. 아마도 감독의 역량이나 배우의 연기문제라기보다는 글자의 이미지를 영상화 하는 것에 대한 오류가 아닐까. 이렇듯 타인의 상상력에 등을 기댄 대가로 처절한 비판을 받는 이들이 꽤 되는데도 끊임없이 영화가 제작되는 것을 보면 상상력의 빈곤 때문일까, 넘치는 오마주 때문인가. '이런 좋은 이야기가 영화라면' 하는 생각은 작가에게 무척 고마운 일이겠지만 좋은 소설이 좋은 영화로 직결되리라는 법은 없는 것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몇 개만 예로 들자면 <어톤먼트>(『속죄』가 원작이다)는 약간 실망스러웠다. 이언 맥큐언의 놀라운 이 글은 '언어로 읽혀야 했을' 종류였다. <박쥐>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을 거꾸로 간다>(전자는 『테레즈 라캥』이 원안, 후자는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이다)의 경우는 원작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 다소 당황스러웠고 <싱글맨>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기대 이상이었다(둘 모두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그리고 <더 리더>와 <렛미인>(이 리뷰에서 언급하는 영화 <렛미인>은 모두 스웨덴에서 제작된 작품을 가리킨다, 헐리우드의 리메이크는 아직 보지 못했다)은 '다르지만 틀리지 않은' 느낌을 잘 살린 영화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더 리더>(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에 집중하며 그 외의 -가족관계나 직업이나 한나의 폭력성 등- 것들을 과감하게 삭제한 대신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소설)는 전후세대의 혼란과 죄책감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전쟁의 책임과 비극적 말로, 그리고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 너의 죄를 용인하는 것인가' 라고 되묻는 것이다. 소설은 언어라는 둔탁한 매체로, 영화는 영화적 기법에 기대 속도감 있게 조명하는 이 작품은 양쪽 모두가 꽤 완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글을 영화화(혹은 영상화) 할 때의 관건은 얼마나 ‘똑같이 재현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영화적 상상력과 가능성을 만족시켰느냐‘에 있는 게 아닐까.

 

<렛미인> 역시 <더 리더>와 비슷한 경우다. 영화 <렛미인>은 아름다움과 색채대비, 과감한 화면 분할 등을 통해 시각적 감각에 충실한 반면 다소 모호한 장면처리로 상징성에만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두 주인공 오스카르와 엘리에게만(책에 표기된 바를 존중, '오스카르'와 '엘리'로 통일한다) 집중하며 둘의 감정 곡선을 쫓는 것은 영화의 특징이다. 반면 소설 『렛미인』은 좀 더 다층적이며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등장인물이 더 많고, 그들 각각을 조명하는 시각도 개성적이다. 특히 스웨덴이라는 나라의 복지정책에 대한 의문과 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불분명함과 고독을 관조하는 시선이 사실상 가장 중요한 축이 된다.

 

가장 인상적인 변화는 -소설에서 오스카르는 그리 빼어난 외모가 아니건만- 영화에 등장하는 오스카르의 아름다움이다. 오스카르와 엘리는 남녀의 구분이 모호하다. 오스카르의 아름다움과 나이는 중성적이며 체구가 작은 외면과 연약한 내면을 함께 부각시킨다.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동시에 가학성을 자극하는 묘한 특징이 혼합된 이 아이는 너무도 눈에 띈다. 엘리 역시 다르지 않다. 예쁘고 직선적인 아이는 또렷한 눈매와 강인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오스카르보다 저돌적이며 냉정하고 애정은 일직선이다. 그렇기에 이 아이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을 때에도 엘리는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둘이 아직 성별 구분이 불분명한 (겉모습의) 나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얼핏 둘은 전통적인 남녀 역할이 뒤바뀐 아이들 같다. 그리고 왠지 비현실적인 아이들의 외모는 아이가 깨끗하고 아름다울수록 참혹성과 냉정함도 배가 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감독의 의도처럼 느껴진다.

 

감독은 두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아름답고 숭고한 두 아이를 다소 냉철하지만 근근이 숭배에 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서로 거의 반대편에 선 두 아이를 하나로 잇는다. 오스카르의 창백한 피부를 엘리의 차가운 손끝과 잇고, 오스카르의 상아색 블론드와 엘리의 검은머리를 대비시킨다. 하얀 눈과 시린 입김과 붉은 피를 대조시키며, 아름다운 소년소녀와 잔혹성을 연결한다. 오스카르와 엘리는 외면과 내면의 간극을 지닌 아이들이지만 그 아이들의 점과 점이 선으로 연결되며 영화는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게다가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영화는 성적인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오스카르의 아버지는 어쩐지 동성애자처럼 보였고, 오스카르를 괴롭히는 아이들도 왠지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는 초등학생 꼬마들' 처럼 느껴졌다. 오스카르의 예쁜 얼굴과 연약한 체구, 위태로워 보이는 분위기는 눈 속에 파묻힌 붉은 피처럼 묘한 선정성과 독특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렇게 영화가 두 소년 소녀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에 의지하고 있다면 소설 쪽은 좀 더 직접적이다. 책에는 고양이에 대한 설명이 있고, 오스카르의 엄마와 교제중인 아저씨가 등장한다. 그 외에도 제3의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그들 대부분이 기묘하게 비뚤어져있는데다 어둡고 불안한 성격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의 호칸은 근친상간의 느낌이 더 강한 아가폐적인 사랑을 표현하는데 반해, 원작에서는 탐욕적이고 소아성애자로서의 욕망과 죄책감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작가가 직접 시나리오를 각색했기 때문일까. 독특하게도 이 작품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있다. 그러니 한쪽만 읽거나 본다 해도 특별히 불만스러운 점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소설을 읽고 싶고, 소설을 읽고 나면 영화가 보고 싶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불분명했던 부분을 소설은 명확히 설명해주고, 소설에서는 불편했던 부분을 영화는 제법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둘 중 한쪽만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취향에 따라 선호가 갈리게 되겠지만, 양쪽 모두를 보게 되면 왼쪽과 오른쪽 손 중 한쪽만 더듬던 것이 서로 깍지를 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영화적 상상과 문학적 탐미의 간극은 이렇게나 멀고도 가깝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빈 집>

 

 

내가 스무살 즈음엔 누군가 '내 언어'를 설명 없이 알아듣기만 해도 기뻤다. '이해할 수 있어'라는 친구를 와락 안기도 했고, '네가 믿는 것을 나도 믿어'라는 말을 듣고는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하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이 서로 다른 영역임을 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는 말이 의심스럽고, 사랑이 있으면 사람은 외롭지 않다는 말도 믿기 어렵다. 외로움과 외로움이 만나 그것이 반이 된다는 말도, 타인의 고통이나 절망을 공감한다는 사람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딱히 내 자신이 -물론 좀 더 냉소주의자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망가졌다거나 훼손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다만 알게 된 것 뿐이다. 믿는 것과 바라는 것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고. 기형도의 詩 <빈 집>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것이 사랑의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 마음 안에서의 사랑은 현실의 '너'와는 무관하다. 그래서 사랑은 -그 상대가 그것을 받거나 아니거나를 떠나- 다소 일방적이고 이해불가하며 폐쇄적인 것 같다. 어느 정도의 광기와 망상을 안고 있고, 그래서 늘 누군가의 빈 집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는 것.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느껴진다.

 

더욱이 타인의 외로움이나 감정은 절대로 나누거나 함께 짊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내가 생각하는 '외로움'은 일상적으로 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지루함이나 관계의 느슨함이나 초조함 따위를 대변하는 말이 아니다. 가족이 내 맘을 알아주지 않는다거나 애인이 자신에게 소홀하다거나 친구가 내 얘기에 관심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외로움이란 감정이 아닌 차라리 상태의 언어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지구에서 몇 억 광년이 떨어진 머나먼 우주에 진공상태로 떠서 다른 행성을 무작정 바라보는 것이랄까. 만질 수도, 만져질 수도, 교감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것. 이해할 수도, 구제받을 수도, 헤어 나올 수도 없는 자기 절망과 비슷한 것. 그것을 '느낄 때'가 아니라 '인정할 때' 나는 겨우 외롭다는 생각에 잠긴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다른 이의 고통이 공감되거나 재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사랑은 다를까. 내가 사랑하는 이는 나를 이해할까. 나는 끊임없이 자문하고 의심하는 한편 어딘가 그것과는 다른 것이 있다는 소식을 기다린다.

 

 

제발, 제발, 제발 날 무서워하지 말아줘.

오늘 밤 만나지 않을래? 그럴 생각이 있으면 이 쪽지에 답을 남겨줘.

싫어, 라고 쓰면 오늘 밤에 떠날게. 그렇지 않아도 곧 떠나야 할 것 같긴 해. 하지만 그래, 라고 하면 한동안 더 여기 있을게. 뭘 써야할지 모르겠다. 난 외로워.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할 거야. 아니, 너도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중략)

……오스카르는 쪽지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다. ……오스카르는 엘리의 이름 밑 여백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펜을 기울여 여백이 꽉 찰 만큼 크게 썼다.

그래.

 

 

『렛미인』을 읽으면서 아주 오랜만에, 아니 마치 처음으로 발음하는 것처럼 "그래, 외로웠겠구나."라는 말이 새어나왔다. 소녀는 늘 입장(入場)을 질문한 후 대답이 나오기도 전 그렇게 해달라고 말한다. 거부당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이 소년에게 밀어내어질까봐 소녀는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렇게 절망스러운 마음을 안고 고백한다. "난 외로워.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할 거야."라고 엘리가 말했을 때 내 가슴 한쪽이 시큰했고, "아니, 너도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라는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애정의 갈구로 들렸고, "그래"라고 여백이 꽉 찰 만큼 크게 쓴 오스카르의 글씨에 가슴이 떨렸다.

 

억겁의 시간처럼 세월을 보냈을 아이의 외로움을 짐작해본다. 이 애처로운 소녀는 오래토록 혼자서 질문했을지도 모른다.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까. 그 사람, 너는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라고. ‘외롭다’라는 것은 아마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연약한 손가락으로 벽을 톡톡 쳐주길, 누군가 자신을 ‘초대’해주길 소녀는 기다려왔을 것이다. 엄마도 엄마의 애인도 아빠도 친구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소년은 ‘자신의 것’이 되어줄 누군가를 꿈꿨을 것이다. 소녀의 고독과 소년의 외로움이 만나 나를 조용히 짚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빛이 존재하는 동안은 서로 교감할 수 없는 소녀와 소년은 서로에게 빛이 되어준다. 너희는 외로웠겠구나.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자 구원처럼 느껴졌겠구나. 그래, 그런 만남은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는 거지. 나는 마치 내 자신이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낡은 목마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라도 내가 되어 봐.”라는 엘리의 말. 내가 상대에게 그토록 바라던 것이 아니었는가. 그래서였을까. 나는 한 번도 이것이 사랑이냐고 되묻지 않았다. 포식자가 다른 피지배자를 찾아낸 것은 아닌지, 누군가는 한번쯤 물었을 질문을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영화 속에서 엘리가 오스카르를 수영장에서 꺼냈을 때, 소년은 희미하지만 아름답게 웃는다. 녹색 눈의 소녀는 그 웃음을 마주하며 조심스럽게 웃는다. 그 때 두 아이는 공범자가 되었고 서로를 사랑 안에 밀어 넣었고 결국 상대방을 구원했다고 믿는다. 오스카르의 미소를 마주한 엘리의 녹색 눈동자는 분명한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소녀의 그 웃음이 사랑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닐 수 없는 눈빛이었다. 소녀와 소년의 사랑은 빈 집에 갇히지 않기를. 떠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만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 알라딘과 교보문고에 동시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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