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 대디, 플라이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스즈키 씨가 너를 부르듯 나도 박 군이라 부르고 싶은데 그에 대해 먼저 양해를 구한다. 마치 몰래 좋아하던 사람의 이름을 들켜버린 기분처럼, 새삼스레 너를 부르려니 쑥스럽고 간지럽다. 대학에 입학한 지 고작 한 달쯤 지났던가, 나는 학교가 시시해졌다. 대학이라는 곳의 피상성과 너무나 예쁘게 꾸미고 다니는 사람들에 놀랐고, 대학이라는 시스템 구조와 그곳을 지배한 헤게모니가 불편했다. 사실은 대학이 아니라 내 자신이 시시했을 뿐인데, 젊은이답게 비관적이었고 이따금 허무했고 자주 도피를 했다. 그래서 나는 도서관으로 갔다. 읽어도 도무지 줄어들지 않을 것 같은 장서가 기뻤고, 활자 냄새에 대한 기대감에 설렜고, 혼자만의 비밀장소를 얻은 것처럼 안도했다. 그 때 읽었던 책 중에 네가 있었다. 나 역시 박군처럼 책을 좋아하고 -비록 니체를 얼마큼 이해했는지 스스로 의문은 들지만- 니체를 읽었고,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독파했다. 나는 너를 스무 살에 만날 수 있어 고마웠고, 구제 받았다는 환상에 들떴고, 너를 동경했다. 너는 내가 되고 싶은 이상이었다.

 

나는 너의 친구들 모두가 좋았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방식의 삶과 기발함과 당당함이 부러웠다. 그리고 이 책의 실질적 주인공인 스즈키 씨 가족에게도 푸근함을 느꼈지만 유독 너를 사랑했다. 너의 정직성과 유연함과 지성과 인내를 닮고 싶었다. 스무 살 적에는 매일매일 너와 같아지고 싶었다. 너는 고작 열여덟 소년이다. 그런데 너는 왜 벌써 알고 있는 것일까(그리고 너의 친구들도). 세상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 필요한 마음, 쌓아지는 지성을. 절대 멋진 척 폼 잡지 않은 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폐부에 와 닿는 것은 왜인가. 자식, 진짜 멋지단 말이야. 나는 몇 번씩 너의 단단한 등을 보며 중얼거렸다. 허나 철이 너무 빨리 든 아이들은 으레 눈이 깊고 조숙해서 오히려 안쓰럽지 않은가. 네가 지나온 세월과 과정과 역사가 짐작되어 안타깝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마치 몇 해쯤 더 산 누나가 된 것처럼 네가 찡했다.

 

게다가 박 군, 사실 나는 늘 남자였으면 좋겠다는 은밀한 상상을 품었었다. 나는 누구보다 여자를 존중하는 사람이니 폄하한다는 오해를 하지는 않길 바란다(박군이라면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남자로서의 삶을 동경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다가가고자 하는 삶에 남자의 것이 편했을 것이라는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사고에 기인한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겸할 수 있지만 여자는 그럴 수 없다, 온다 리쿠는 그녀의 소설에서 그런 말을 했고 분하기보다 안타까웠다. 여자인 나는 이 세계에 그저 용인되거나 종속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따금 유리된 세상에 살고 있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물론 자격지심이겠지만.

 

무엇보다 나는 남자의 몸을 동경했다. 뼈가 불거진 체형과 여자의 것과는 전혀 다른 근육의 성질과 순간적인 폭발성을 갖춘 -마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마르지만 단단한 소년의 것 말이다.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근육을 갖고 싶었다. 굵은 뼈와 강한 힘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사용하고 싶었다. 여자의 부드럽고 유연한 몸의 따뜻함도 사랑하지만 남자의 무뚝뚝한 평평한 몸이 갖고 싶었다. 그래서 너를 더욱 동경했을 지도 모른다. 타인을 압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완력이 아니라 타인을 인도하기 위해 만들어낸 너의 인력을. 명민하고 재빠른 너의 운동신경과 아름답고 절도 있는 너의 움직임 그 자체를 선망했다.

 

너와 네 친구들을 마주하며 나는 스즈키 씨가 된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처럼 나약하고 때때론 비겁하거나 무심하며 평범했다. 허나 나도 작지만 튼튼한 날개를 달고 싶었다. 너를 자주 만나며 선생님 뒤를 쫓아다니는 열등생처럼 배우고 깨닫고 기다렸다. 삶이 무거운 날에는 네가 춘 매의 춤을 떠올린다. 곧은 너의 눈빛과 질타를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모질게 대한다. 네 말처럼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두려움으로 가득 채우고 파르르 떨던 날들을 반성한다. 상상을 배가시키고 고독 앞에서 침묵하며 불안을 기꺼이 안는다.

 

"어떤 사람이라도 싸울 때는 고독해. 그래서 고독마저도 상상을 해봐. 그리고 불안이나 고뇌가 없는 인간은 노력하지 않는 인간일 뿐이야. 정말 강해지고 싶으면 고독이나 불안, 고뇌를 물리치는 방법을 상상하고, 배워보는 거야. 자기 힘으로."

 

'노력하는 한 방황하리라' 라고 말한 괴테의 말처럼 나는 너의 말 또한 믿는다.

 

요즈음 나는 예전처럼 너를 자주 찾지 않는다. 고작 다섯 해가 흘렀을 뿐인데, 네 앞에 서면 내가 이렇게나 낡았다는 생각이 든다. 너는 여전히 눈부시지만, 지금의 나는 너의 찬란함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너의 곧은 눈은 때로는 극찬의 격려가 때로는 무언의 질타가 되어 돌아온다. 박 군, 네가 나의 비겁함을 너무 심하게 비난하지 않길 바란다. 너는 영원한 소년이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게다가 (사회적인 의미의) 어른이 된다는 일은 날개가 돋아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처절하고 고독한 일인지도 모르니. 그러니 틈만 나면 너를 찾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그저 침묵하고 인내하고 노력할 뿐이다. 너를 떠올리며.

 

이 얼마나 부드러운 움직임인가.그렇게 박순신은 잠시 동안 나의 상상력이 넘어선 곳에서 움직이면서 자유자재로 날갯짓을 했다. 저녁노을에 비친 날개의 움직임은 너무도 아름답고 힘차서, 박순신이 날아가 버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따금 나도 네가 날아 가버리지 않을 지 걱정된다. 네가 스무 살 내게 남기고 간 것과 네게 뺏긴 것을 생각한다. 너와 말썽쟁이지만 매력덩어리인 너의 친구들로 웃는다. 너는 여전히 아름답고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겠지. 박 군, 나는 너의 강직함과 포용력과 유연함을 사랑한다. 영원한 소년인 나의 박 군, 너는 여전히 나의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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