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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냐 추녀냐 - 문화 마찰의 최전선인 통역 현장 이야기 ㅣ 지식여행자 3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때때로 글을 쓰고 그것에 대해 다함께 토론을 하거나 누군가에게 첨삭 지도를 받기도 한다. 그때부터 내 머리카락은 성할 날이 없었다. 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왜 이리 힘든지, 매일 쓰던 한국어는 언제부터 이렇게 어려웠는지, 기껏 머리를 짜내 쓴 표현들은 왜 이렇게도 비루한 것인지. 어떤 것들은 감성적이지만 알맹이가 없었고, 어떤 말들은 적확하지만 세련되지 못했다. 게다가 유난히 번역 투의 문장 혹은 일본식, 영어식 표현을 자주 쓰는 친구도 역시 지적을 많이 받았다. 우리는 언어의 홍수 속에서 겁을 먹고 철렁이고 있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녀가 겪은 이야기, 느낌과 생각을 바탕으로 통번역에 대한 허심탄회한 일종의 고백록과 같은 책이었는데, 나는 줄곧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거나 키득거리거나 애처로워하며 읽었다. 그게 이 책이다, 요네하라 마리의 『미녀냐 추녀냐』.
정확히 말해서 이 책의 제목은 ‘부정한 미녀냐 정숙한 추녀냐’일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미녀와 추녀는 통역과 번역에 관한 것인데, 그녀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표현은 아름답지만 원문에 충실하지 않는 쪽은 부정한 미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설명이지만 표현으로선 그 가치가 미비한 쪽이 정숙한 추녀인 것이다. 다소 황당한 표현일 수 있지만 이보다 정확한 말이 있을까. 아, 그것은 내가 가장 고민한 -비록 내가 했던 일은 통역이나 번역이 아니었음에도- 것 중의 하나가 그것일진데. 비단 나 뿐 아니라 이미 번역 된 책을 읽으면서도 가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유려하고 원색적인 언어의 마법을 부리지만 공허하게 와 닿는 글과 의미만 파악 될 뿐 회의록을 읽고 있는 듯한 글. 물론 가장 완벽한 것은 -아름답고도 깔끔한 문장인- 정숙한 미녀이겠지만 그 경지에 닿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마리 여사는 토로했고 나는 긍정했다.
그런데 통번역자의 고충은 아름답고도 명확한 표현에 국한 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귀여운 정도가 아닐까. 그들의 어려움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한다. 주제나 용어에 대한 이해는 물론, 그 용어에 대한 함의까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 어떻게 통역할 것인지, 사투리나 독특한 말투는 어디까지 전할 것인지도 문제다. 게다가 그들은 늘 까다로운 두 명의 주인을 섬겨야 한다. 마리 여사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통역, 번역이라는 행위는 메시지의 발신자와 수신자라는 두 사람의 주인에게 항상 신경 쓰며 두 주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절대로 나서지 않고 자신을 억눌러야 한다. 더구나 그 운명은 두 사람의 주인에게 달렸으니, 생각해 보면 정말 가혹하고 불리한 일이 아닌가. 조금 더 학문적으로 표현을 하면 통번역은 메시지의 발신자와 수신자에게 의존한다. (p.60)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 둘을 철저하게 균형적으로 냉철하게 보필하면서도 양 쪽을 조율해야한다. 설상가상 두 명의 주인은 발신자와 수신자뿐만이 아니다. 우선 두 언어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사용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말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둘러싼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때때론 일반인과 전문인, 혹은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라는 두 세계를 통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통번역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양쪽의 전문가(혹은 그에 가깝게)가 되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니 정말이지 이렇게 힘든 일도 없겠다 싶다.
게다가 시간은 없고, 그들의 입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많다. 그들이 통역 부스에 앉아 있는 순간 그들은 숙련되고 재빠른 특수요원이어야 하며, 동시에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고독함의 황야에 서 있는 것이 된다.
결국 통역, 번역은 기본적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일본어다운 일본어가 있는데, 그것을 러시아어 같은 일본어로 한 번 바꾸고, 다시 일본어 같은 러시아어로 바꾸기, 그리고 러시아어다운 러시아어로 바꾸는 네 단계가 있죠. 물론 제2,3단계는 통역사와 번역가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과정으로 통역사는 이 과정을 순식간에 합니다 (p.65)
통역사는 통역하는 중에는 자신이 지금 기억 속에서 꺼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할 수밖에 없다. 사전이나 참고서, 전문 서적과 같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기억 장치를 찾아볼 수 없다. 번역가처럼 기억의 부담을 외재적 기억 장치에 지울 수 없다. 자신의 기억력 이외에 의존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통역 중에 적는 노트테이킹과 미리 추측해서 작성한, 그것도 한 장의 종이에 다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용어집 정도다. 태어난 이후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온 교양과 상식, 이전에 축적하거나 사전 준비를 하면서 허둥지둥 집어넣은 지식과 어휘 등,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억을 순간적으로 꺼내서 사용해야 한다. (p.115)
무엇보다 어중간한 지식인이 아니면 통역 일은 하지 못한다. 모든 분야와 주제를 파헤쳐서 철저하게 규명하려고 하는 진짜 지식인과 달리, 오늘은 이 주제, 내일은 저 주제라며 나비처럼 학문과 전문 분야를 날아다니기 위해서는 어중간함은 반드시 필요한지도 모른다. 언제나 완벽을 꿈꾸며 목표로 하면서 영원히 이루지 못하는, 항상 발전도상 상태인 신분이다. (p.340)
여기까지 읽다 보면 그들에 대한 존경과 경의는 물론이거와 사실 약간의 애처로움까지 느낀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저 다리의 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조금 이상한 비유지만 청소 같은 것이다. 안하면 티가 나는데 하면 티도 안 나는 것. 없으면 아쉽지만 있을 땐 좀처럼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되는 사람. 그런데 그들의 능력과 순발력, 노력과 고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쯤에서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내가 이 책을 무조건 즐겁고 술술 읽었냐면 사실 그것은 아니다. 마리 여사가 경험을 토로하는 부분 -예를 들면 양어장 시설, 하수 시설, 프리마돈나의 인터뷰, 만국 가금 회의 등- 에선 웃음이 나면서도 나까지 머리가 아파 괜한 머리카락을 -또 다시!- 쥐어 잡기도 했다. 블랙박스와 인풋, 아웃풋까지 그림으로 설명하는가 하면 일본어, 러시아어도 모자라 독일어와 중국어 얘기를 할 때는 기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굉장히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읽으려고 했다. 낯선 세계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 그리고 그들의 일에 대한 경배이기도 했지만 사실 얼마만큼은 미안함과 보상심리이기도 했다.
책은 단 한명의 작가에서부터, 그 (혹은 그녀)의 머릿속에서부터 나왔다고 믿는 순진한 때가 있었다. 생각의 나무가 한 사람의 머리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고, 이 책이 탈고되기까지 그 어떤 것도 -작가의 퇴고를 제외하고- 더해지거나 빠지지 않았다고 믿었던 시기. 그때 내가 선망했던 것은 작가 그 자신이었고, 폄하했던 것은 번역자와 편집자였다. 그리고 우연히 베스트셀러의 탄생과정에 대한 책을 읽고 편집자의 능력과 행동반경(?)에 대해 경의를 보낸 일이 있었다. 그 후 꽤 오랫동안 톡톡한 수혜를 누려왔음에도 번역자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의 역할에 대해서 사실상 등한시했다.
한때 일본문학에 빠졌었다. 어딘가 찰나적이고 무연한 시선과 독특한 내용, 차갑고 부드러운 문체에 반했었던 것이라. 그때는 문장 하나를 두고두고 곱씹는 것이 내 버릇이요, 즐거움이요, 탐욕이자 간식이었다. 그 유려한 문장들을 앞에 두고서야 문득 이 글을 이렇게 완성시켜준 번역자에게 -무례하지만 처음으로- 감사했다. 번역이란 작가에게 기생한 하나의 편린이 아니었다. 외국어를 못하는 이들에게도 외국의 문학을 전하는 고마운 사람, 두 가지 언어와 그 문화에 익숙한 능력자, 단순히 말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문체를 살리기 위해 머리를 쥐어 싸맬 친절한 연금술사, 어떤 의미에선 (외국의) 작가 그 자신보다 더 감사해야 할 사람. 그때부터는 번역자의 이름도 꼭 챙겨보고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게다가 존경하는 번역자들도 생겼으니 이제는 정말로 팬이 다 되었다. 어쩌면 번역가의 고충에 대한 이해와 고마움, 그리고 무시했던 지난날에 대한 보상일까. 때론 난해하고 남의 것 같기만 한 이 책도 진지하고 즐겁게 읽은 이유가.
여담이지만 이 책을 번역했을 분을 생각하니 다시 웃음이 났다. 번역가의 책을 번역하면서 얼마나 신경이 곤두서있었을까, 이 안에 쓰인 텍스트에 가장 먼저 제일 많이 공감한 사람이었겠지, 번역가를 번역하는 것이 즐겁고도 막막한 일이었겠지. 이제는 책을 읽기 전에 세 명에게 감사를 한다. 우선 고독 속에서 창작을 한 작가, 그 작가를 키워낸 편집자, 그리고 그 글을 완성시킨 번역자. 이 글을 읽고 나서 새삼 한 권의 책을 둘러싼 이들에게 감사와 존경심이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