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숨그네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먼저 작가의 이력을 읽는다. 한숨이 나온다. 그 한숨은 질량감이 있지만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찬찬히 읽어가기 시작한다. 책을 넘기며 문득 200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임레 케르데스의 책이 생각난다. 그 때 느꼈던 묵직한 피로감과 알 수 없는 부채감, 파르르 떨었던 손끝의 감촉이 떠올랐다. 세상에는 '그런' 책들이 있다. 생의 무게를 어깨에 가득 짊어본 적이 있는 자, 죽음에 이르는 공포를 느껴본 적이 있는 자, 견고하고 묵직한 시선을 보낼 수 있는 자만이 쓸 수 있는 글. 그저 소설로만 넘기기엔 묵직하고 막막한 활자의 냄새.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도 '그런' 책이었다.
주인공은 레오폴트 아우베르크. 『숨그네』는 이차대전 후 루마니아에서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열일곱 살 소년 레오의 시점으로 그려진 수용소의 모습과 그 안의 삶이다. 우리가 여태껏 만나온 영화와 글 속에서 그렇듯 『숨그네』에 묘사된 수용소의 모습 역시 인간 이하의 것이라 생각 될 만큼 처참하다. 그리고 절대 고독과 공포 앞에서 살아남으려는 이들의 움직임은 차라리 생에 대한 복수에 가깝다.
헤르타 뮐러는 수용소 안에 갇힌 다양한 사람들, 그들의 노동, 생의 방식에 대해서 고요하고도 처연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사물에 대해서도 독특하고 묵직한 언어들로 그 존재 자체를 설명한다. 『숨그네』는 절대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문장은 뚝뚝 끊어지고 내용은 괴롭고 단어는 낯설다. 죽음의 향기와도 같은 서늘함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기도 하고, 시원한 방 안에서 읽고 있는 현재의 삶 때문에 더욱 서글퍼지기도 한다.
어디선가 이 책을 두고 언어로 만들어진 예술품이라고 말했다. 아아, 어쩌면 그것마저 사치가 아닐까. 날 것 그대로의 생의 진실을 목도하는 자들, 누군가와 분배할 수 없는 공포와 본능적인 욕구만 남은 자들의 언어를 미술품을 감상하듯 말하는 것은. 극도의 곤궁이나 허기짐을 겪지 않은 -'바깥'에만 머물러 본- 자들의 교만한 말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한편으론 '예술품'이라는 말 자체에 공감하게 된다. 이 문단들을 보라.
배고픈 천사는 입 안에, 내 입천장에 오롯이 매달린다. 그것 배고픈 천사의 저울이다. 배고픈 천사가 내 눈을 제 안경처럼 덧쓰고, 심장삽은 현기증을 일으키고, 석탄은 흐릿하게 보인다. 배고픈 천사가 내 뺨을 그의 턱 위에 끼워 맞춘다. 그리고 내 숨결을 그네 뛰게 한다. 숨그네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심한 착란 상태이다. 눈을 올려 뜨면 저 위로 조용한 여름솜, 구름의 뜨개질. 내 뇌는 바늘 끝에 꿰여 하늘에 고정된 채 꿈틀거린다. (p.97)
배고픔의 단어는 모두 먹는 단어다. 눈앞에 음식이 그려지고 입천장에 맛이 느껴진다. 배고픔의 단어들 혹은 먹는 단어들은 환상을 먹여 키운다. 말이 말을 먹으며 맛있어한다. 배는 부르지 않지만 적어도 음식 곁에 머문다. 만성적으로 굶는 사람들은 저마다 선호하는 단어가 있다. 드물게 쓰는 단어와 지속적으로 쓰는 단어가 있다. 각자 제일 맛있어하는 단어가 따로 있다. 카푸스타처럼 명아주 역시 먹는 단어에 들지 못한다. 먹는 단어는 실제로 먹는 것 혹은 먹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178)
권태는 불안을 견디는 것이다. 권태가 작정하고 내게 다가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권태는 그저 가끔 내가 잘 지내는지 알고 싶어할 뿐이다. (p. 232)
나를 목표로 하는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어 복귀. 복귀라는 단어는 원래 의미는 제거된 채 마치 수용소로서의 복귀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 같다. 내게 복귀가 실현되고 나면 그 말은 쓸모가 없어진다. 회상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손상이란 말도 내가 복귀하고 나면 쓸모가 없다. 경험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이 쓸모없는 단어들을 접하면 나는 원래보다 더 멍청한 척해야 했다. 그러나 그 단어들은 만날 때마다 이전보다 강해졌다. (p.259)
문장의 감정은 무뚝뚝하고 농담(濃淡)은 일정하다. 설명은 독특하지만 의미는 적확하다. 세상에는 간단하게 쓰이고 쉽게 읽히는 글도 있지만, 헤르타 뮐러의 글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물 위로 돌을 던져 잔잔히 파동이 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언어로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생활이나 삶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린 경험을 해본 자만이 쓸 수 있는 글, '쓰고 싶어서'가 아닌 '써야만 했기에' 쓴 글. 수용소의 삶이란 절망스러울 정도로 한결같다. 춥고 가난하고 헐벗고 냉혹하다. 그런데도 글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담백한 언어로 표현해낸 수수하지만 단아한 도자기 같다. 그렇기에 그 안에 담긴 정수는 더더욱 아프고, 언어는 더욱 더 유려해진다.
『숨그네』의 독특한 점은 -아름다운 언어를 제외하고- 레오가 수용소에서 돌아온 후의 삶까지 조명한다는 것에 있다. 대부분의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는 귀향한 후의 삶에 대해서 잘 다루지 않는다. 독자에게 판단을 맡기려는 일종의 열린 결말일수도 있고, 귀향까지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숨그네』에는 돌아온 레오가 자신의 삶에 녹아드는 과정 또한 표현되어 있다. 레오는 자신이 돌아올 것이라 믿었을까. 할머니가 해준 말을 늘 상기했던 것은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과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회한이 혼합된 마음이 아니었을까. 씻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것. 겪지 않은 자들과는 나눌 수 없고, 겪은 자들과는 나누기 싫은 백일몽 같은 삶이라니. 레오는 귀향 후 살아남았다는 안도와 가족들에 대한 부담, 차라리 그곳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모를 절망감을 안고 살지 않았을까. 역사의 대부분이 그렇듯 죽은 자들보다 살아남은 자들의 삶이 더 아프지 않은가.
귀향 후의 삶을 그린 것과 단 한 켠의 위무라는 의미에서일까, 문득 슈테판 츠바이크의 『체스 이야기』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갇혀 있는 감옥 안에서 체스 판을 떠올린 것. 그 안에서 가상의 수많은 체스 경기를 대전하는 것. 그것으로 수감된 생활을 '죽음으로 도피'하려던 것은 애써 이겨낸 것. 그때 그에게 체스는 단순히 64칸의 놀이가 아니라 삶을 버티게 한 일종의 도피이자 동아줄이었던 것이다. 『숨그네』에 등장하는 하얀 손수건이 그러하듯이.
시원한 곳에서 음료를 마시며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나로선 책의 깊이를 아마 이해하는 것도, 감당하기도 힘들 것이다. 다만 마음 속 어딘가에서 싹트는 생경한 아픔이 느껴졌다. 삶이란 아픈 것이구나. 살아간다는 건 슬픈 일이구나. 그렇기에 언어는 아름다운 것일까. 두서없고 근거 없는 감상들이 흘러나온다. 무거운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 고개를 돌린 바깥에는 슬퍼질 만큼 아름다운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아, 이 책은 처연한 죽음의 그림자로 빚은 예술의 낱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