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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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의 성격상 결론이나 일종의 해결법이 약한 점은 아쉽지만 고통에 대한 단계적이며 체계적인 분석이 인상적이다. 모든 고통이 다 같은 고통일 수 없다는 사실과 같은 고통이 같은 해법을 가지지는 않는다는, 고통은 근본적으로 동행할 수 없다는 인정과 고통과 피해를 가르는 방식 또한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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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21-06-21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해자를 고통에 찬 사람으로만 재현하는 것은, 그가 피해자로서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존재로만 보이게 한다. 이것은 그에게서 말도, 삶도 모두 박탈하는 폭력이다. 피해자는 고통받는 사람이기에 오로지 고통스러운 모습만 보여야 한다. 그에게는 고통 이외의 다른 일상이 없다. 아니, 고통 때문에 돌아갈 일상이 없는 존재이기에 그는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하나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밥도 맛있게 먹어서는 안 된다. 그는 누군가와 데이트를 해서도 안 되고 여행을 가서도 안 된다. 고통 이외에 다른 것을 말해서도 안 된다. 고통을 받는 그는 화려한 옷을 입어서도 안 된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에게는 일상이라는 삶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에게 허용되는 것은 오로지 ‘죽음‘이다. 세상이 붕괴된 죽은 자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가 지켜야 하는 ‘일관성‘이다.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피해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피해자는 피해로 인해 일상이 파괴된 사람이고 그 일상의 파괴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다. 그런 데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그가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의 반증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피해자에 대한 연민은 고통을 당한 사람‘답게‘라는 가면이 벗기지는 순간 순식간에 그에 대한 조롱과 공격으로 전환된다.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팔 때는 ‘공감‘이나 ‘연민‘, ‘연대‘ 나˝인류애‘ 같은 말로 포장하기도 쉬웠다. 상업적으로 포장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어필할 수 있었다. 동의하지 않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기도 쉬웠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고통을 사회에 알리고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면 비난을 피해갈 수 있었다.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면, 타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자신에 대한 윤리적 면피를 할 수 있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마련할 수 있었다.

고통을 겪는 이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자신이 고통에 차서 절규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던 사람들이 이런 시장에서 원하는 방식대로 이야기했을 때 주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고 그 자신의 고통을 위로받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선 이러한 주목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야기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끌 있는 포맷이 만들어졌고 그 공식에 따라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복제되듯 생산되었다. 고통을 겪는 자 신에 대한 관찰과 성찰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맞춰진 틀에 따라 이야기를 했을 때 훨씬 효과적이었다.

고통을 파는 이야기의 포맷은 피해자의 피해자됨과 비참함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포르노처럼 보여줬다. 이런 이야기들이 시장의 주목을 받으면서 경쟁이 격화되었고, 고통의 표현 강도도 더욱 높아져만 갔다. 고통을 파는 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고통의 맥락이나 이유. 결과가 아니라 고통의 강도가 되었다. 더 강하게 몸부림쳐야 했고, 더 처절하게 울부짖어야 했다.

무엇보다 피해자는 모든 것을 다 드러내야 했다. 그래야 피해자였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지부를 다 까발려서 보여줘야 했다. 그걸 ‘용기‘라고 부추겼다. 피해자에게 보호되어야 할 인격, 감추어져야만 보호될 수 있는 존엄은 없었다. 그것까지 드러내야지만 피해자‘로 인정되었다. 피해자는 자신의 존엄을 파괴할수록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포르노처럼 자기를 드러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인정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끌 수 없었다.


책 내용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