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원주민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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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나는 왜 네가 아니고 너인가의 영향 때문일까. 아니면 자라면서 들은, 읽은, 때로는 출처가 불분명한 인디언들의 일화나 명언 때문인가. 언제부터인가 인디언(정확히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지혜와 현명함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두 늙은 여자의 책 소개를 읽고서도 여타 다른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의 내용을 짐작했다. 과묵하고 인내심 있고 끈기 있는 인디언들이 들려주는 뭉클하면서도 교훈적인 아포리즘 말이다. 보라, 책 띠지에도 쓰여 있지 않은가. 생존에 관한, 성장 소설이라고. 하지만 막상 책장을 펴서 접하게 되는 내용은 예상과는 달랐다.

 

사와 칙디야크는 여든 개의, 일흔 다섯 해의 여름과 겨울을 보낸 노인들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그들은 부족 전체에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 대개는 젊은 여자들이 그들을 보살피는데 그들은 그것을 당연히 여겼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젊은 시절에는 다른 노인들을 보살폈고, 그들에게 공동부양은 당연한 의무이나 책임이었느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자신의 몫은 해내고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기아와 추위와 이동은 사람들로부터 온정을 앗아가는 대신 실리적인 계산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부족 전체의 손해일 뿐 결코 인력이나 노동력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사와 칙디야크는 결국 버려지게 되었다. 그나마 그들이 갖고 있는 것들을 빼앗지 않는 것, 그들을 직접 죽이지 않는 것(과연 이쪽이 더 잔인한 선택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이 부족과 족장이 베풀 수 있는 남은 정이었다. 하지만 이 결정은 당연히도 사와 칙디야크에겐 큰 슬픔과 두려움,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 스스로 거동도 쉽지 않은 이들을 놓고 떠나는 것은 말 그대로 사형선고나 다름없지 않은가. 게다가 가족이 없는 사와 다르게 칙디야크에겐 딸과 손자까지 있었으나 그들 역시 집단을 등지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녀의 곁에 서지 못한다.

 

이제 부족은 떠났고 그들은 죽음을 맞이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절망의 순간, 사와 칙디야크에겐 무언가,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던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어쩌면 복수심이나 반골기질, 아니면 차라리 치기에 가까운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생존을 향한 투지가 사와 칙디야크에게 생겼다는 것이다. 이전과는 다르게, 정말로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의지가 솟아났다. 게다가 그들은 둘이었다. 비록 상대도 나만큼이나 지치고 낡고 늙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혼자인 것 보다야 나을 터였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뭐라도 해보고 죽자고.”

 

그들은 남은 짐을 꾸려 여정을 떠난다. 자신의 부족과 마주치지 않도록, 또 다른 포식자 즉 다른 생존자들과 싸우지 않아도 되는 곳을 찾아. 그 곳은 어릴 때 그들(정확히는 그들의 부족)이 살던 곳이었다. 자신들처럼 늙은 이가 그 곳을 기억해내지 않는다면, 그 곳이 그들 기억에서와 일치하다면, 고향은 안식이 되어줄 것이다. 그들은 그 일념으로 얼어붙은 강 위를,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무릎과 다리를 이용해 살을 에는 추위를 뚫고 이동하고 또 이동한다.

 

칙디야크는 몸속 깊은 곳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달빛이 사의 미소 짓는 얼굴을 비추었다. 사는 자부심에 찬 동시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수없이 했던 일이지만, 내가 또다시 해낼 줄은 몰랐어.”

 

칙디야크는 오랫동안 친구를 물끄러미 응시하고는 그녀의 말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살아남으려 애쓰지 않는다면, 죽음은 반드시 닥쳐올 터였다. 그녀는 자신들 두 사람이 과연 이 엄혹한 계절을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강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친구의 목소리 속에 깃든 열정이 그녀의 기분을 좀 나아지게 해주었다.(중략) 그러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어떤 힘이 자신을 채우는 것을 느끼며 사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두 여인은 너무 늦지 않게 스스로를 추슬러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지식과 기술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사는 오랫동안 사냥을 한 적이 없었고 오랜 시간 더는 사냥을 할 수 없다고 여겨왔기에 먹잇감을 발견하고 집중을 해 정확한 위치를 겨냥해 손도끼를 던져 해낸 첫 번째 성공은 의미가 깊었다. 비록 작은 다람쥐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이 일로 인해 자신들이 어쩌면더 큰 사냥을 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생존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노마지도老馬知途라고 하던가. 마침내 터를 잡고 물고기를 잡고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고 땔감을 주워 불을 피우면서 그녀들은 오래 전 가졌던, 이제는 잊혔다고 생각했던 지식과 기술을 발휘한다. 낮에는 사냥을 하거나 덫을 설치하는데 전념하고 밤에는 옷가지나 담요를 만들었다. 행동에 패턴이 생기고 몇 가지 요령과 기술이 붙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오지 않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이동을 하고 사냥을 하고 심지어 식량을 비축하기까지 한다. 가끔씩 치받는 두려움과 설움을 묻어두고 내일을 위해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최대한 깊게 잠을 자던 그들은 점차 서로를 좀 더 깊이 알아가며 지난 날을 떠올린다. 

 

그들의 부족은 이런 한가한 대화에 귀중한 시간을 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교제를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정보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 여인은 긴 저녁나절 동안 예외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상대의 힘겨운 과거에 대해 알게 되자 서로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커져갔다.


사실 사와 칙디야크 모두 같이 지내기에 썩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둘은 불평이 많았고 쓸모없는 잡담을 하길 좋아하고 자신들의 나약함을 과시하거나 동정받으려는 태도를 취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지팡이는 커녕 사냥을 하고 생산적인 행위를 하고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건전하고 영민하다. 게다가 서로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저처럼 늙고 보잘 것 없고 성가신 상대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꽤 오랜 시절을 함께 했음에도 말이다. 사와 칙디야크는 기본적으로 각자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종종 대화를 나눴다. 서로의 삶과 그들이 어릴 적 보고 듣고 느꼈던 것, 한 때는 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 등. 대화를 나눌수록 사와 칙디야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연민하게 되고 지난 시절 자신들이 얼마나 짜증나는 사람들이었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두 늙은 여자』의 재밌는 점은 이 부분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인디언의 지혜'라는 교훈으로 묶이는 결코 훈훈한 글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와 칙디야크는 버려졌고 부족들은 그들을 버렸고 심지어 버림받은 이들의 태도 역시 끈기 있고 현명한 사람들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렇기에 더 흥미롭고 설득력이 있다. '인디언'이란 이름 하에 무작정 현자가 들려주는 훈화로 묶이지는 않되 그녀들이 절망하고 희망을 갖고 변화하는 과정을 보면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과장해서 표현하면 반면교사를 통한 성장 이야기라고 할까. 사와 칙디야크는 힘이 없고 나약하고 의지 또한 없었지만 오히려 버려졌기에 자신들의 삶을 바꿀 기회를 얻었다. 스스로가 강하고 현명하고 부지런하며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는 기세를 몰아 큰사슴을 쫓아갔다. 그녀는 젊은 때처럼 힘차게 달릴 수 없었다. 달리기라기보다는 절뚝거리는 경보에 가깝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 커다란 짐승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중략) 그녀는 자신이 그 큰사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고집스럽게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 즈음 그들은 살아남은 자신의 부족민들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건강하게 살아남은 노인들을 보며 경탄을 하며 용서를 구한다. 사와 칙디야크는 여전히 배신감과 복수심을 잊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못 본 척 할 수는 없었고 또한 딸과 손자가 보고 싶었기에 그들을 용서한다. 대신 자신들의 공간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독립적인 객체로서 그들과 대등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가 떠올랐다. 버림받은 이가 대륙을 횡단하며 이동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살을 에는 추위와 배신감이라는 감정과 결국엔 수천 킬로를 가로질러 생존했다는 이력도 그렇지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들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 마지막에는 사와 칙디야크가 실제로 이동한 경로가 지도로 수록되어 있는데 그 독하디 독한 겨울동안 일흔 다섯, 여든의 노인이 이러한 길을 이동하며 생존했다는 사실은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레버넌트>의 실제 인물인 휴 글래스도 4,000km를 이동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등을 다친 후에, 기어서 말이다). 인간이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생각하는 동시에 인간이란 때론 또 얼마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가 깨닫는다(예를 들어 휴 글래스가 결국 다른 부족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점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이 글의 초반에 썼던 말을 정정해야 할 것 같다. 『두 늙은 여자』는 과묵하고 인내심 있고 끈기 있는 인디언들이 들려주는 뭉클하면서도 교훈적인 아포리즘이 맞다. 책 띠지에도 써있지 않은가. 생존에 관한 성장 소설이라고. 옳다, 이 이야기는 생존에 관한 성장소설이자 지혜로운 삶에 대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예감은 틀린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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