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네치를 위하여 - 제2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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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한 작가가 말하길 요새의 문학은 위악적인 인물만 등장한다고 한다(팟캐스트였나 라디오였던가 아니면 지면 인터뷰였나. 분명 그 말은 또렷한데 이상하게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에는 위선적인 인물들이 주인공이거나 주요 인물이었다면 요새는 저마다 위악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차이가 뭘까 어느 쪽이 더 나은 예술의 화자일까 생각해보았다. 결국 뭔가를 꾸미거나 위장한다는 의미에서 비슷한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요새는 희미하게나마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고마네치를 위하여는 꽤 올드한 소설이다. 이른바 달동네라고 불리는 S동에 사는 주인공 고마니는 재개발이 몇 번씩 좌절된 지어진 지 40년이 되어가는 주택에 산다. 실패와 부진한 소득을 이유로 몇 번을 전업한 분식집 사장님인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모자란, 하지만 사실 자신은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서라고 주장하는 어머니와 함께. 어릴 적 친구들과 어울려 체조를 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만 체조를 배우는 학생이 되어있었고 꿈은 고마네치처럼 뛰어난 체조선수가 되는 것이었지만 어느새 고만고만해진 삶을 살고 있는 현재는 실업자이기까지한 평범하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한 주인공이다. 그녀가 천천히 회고하는 자신의 지난 삶은 특별할 것이 없다. 시작점이 평균보다 낮고 진폭이 클 뿐 가계의 부채라던가 재개발에서도 채택되지 못한 버려진 공간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록 가난하고 별 볼 일 없긴 해도 부모님이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다. 아, 다른 게 하나 있다면 그녀는 어릴 적 체조선수가 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 열망만으로 체조를 배웠고 꽤 오랫동안은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믿기도 했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이 고마니라는 것은 제2의 고마네치가 되기 위한 운명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나야 애니까 암것도 몰랐지. 근데 엄마는 어른이었잖아. 진짜 내가 체조 선수 돼서 메달 따 오고 그러는 거 기대했던 거야?”

그런 것도 있고, 그냥 너한테 체조 가르치는 게 좋았어. 엄마 노릇 하는 것 같아서. 생각해보면 내가 엄마 노릇 한 거라고는 그거밖에 없었던 것 같아.”

엄마는 그 이후로도 계속 먹여주고, 입혀주고, 꾸준한 잔소리로 나를 닦달하며 충실하게 엄마 노릇을 해왔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엄마가 생각하는 엄마 노릇의 기준은 좀 다른 모양이다. 나는 왠지 씁쓸해 보이는 엄마를 위로하고 싶었다.


진짜 부끄러운 것은 체조 선수를 꿈꾸며 에어로빅 학원에 다니던 열 살의 내가 아니라 그 시간들을 부끄럽게만 기억하는 스물다섯의 나였다


내가 아는 모든 어른은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원장도 그렇고코치도 그런 것 같고자세히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엄마와 아버지도 아마 다른 꿈이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나도 꿈을 이루지 못한 어른 중 한 명이 되었다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패 이후의 삶을 살아낸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나디아 고마네치의 삶 역시 녹록하진 않았다. 어려운 시기에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사실은 시대 뿐 아니라 그녀 자신의 인생까지도 좀먹었으니. 하지만 그녀는 결국 미국으로 망명을 했고 그곳에서도 적지 않은 고생을 했겠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 굳건히 제 삶을 지키며 살아가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가 세운 기록과 이름 역시 불멸하지 않으며. 그에 반해 고마니, 아니 우리 대부분의 삶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일까 고마니가 하는 생각들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재능 부족에 대한 한탄과 게으름에 대한 수치, 비겁함에 대한 자기혐오, 그러나 나 역시도 이 정도는 치열하게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자기연민까지. 실패 이후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이라는 그녀의 말은 퍽 공감간다. 


, 무슨 애들이 입이 저렇게 거칠어. 화장은 또 저게 뭐고.”

아버지는 피식 웃었다.

착한 애들이야.”

에휴, 우리 아버지, 요즘 애들이 얼마나 무서운 줄도 모르고.

내가 가게 잠깐 비워도 오뎅 하나 꺼내 먹는 법이 없는 애들이야. 음식 남기면 안 된다고 꼭 싹싹 깨끗하게 먹고 가고.”

그것만 보고 착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너는 그럼 말하는 것 조금 듣고 쟤들이 어떤 애들인지 어떻게 아니?”

할 말이 없어졌다.


받아 적는지 잠시 조용하더니 경력이 십 년이나 되시네, 라는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허허 웃었다. 경력, 경력이라. 십 년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구나 싶어 취직 여부와 상관없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그렇다면 위악과 위선은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본다. 악을 흉내내는 것과 선을 꾸며내는 것은 왜 다른걸까. 짐작컨대 위악이란 악, 혹은 나쁜 것을 연기하기 때문에 그 내면에 의식 속에선 스스로가 '적어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고 가정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위선은 스스로를 그리 훌륭하지 않게 평가하는 와중에 선을 추구하지 않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확대 해석하자면 일종의 겸양도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 


이 책 속 인물들은 밋밋하지만 수수하고, 정직하지 못한 순간조차 솔직하다. 타인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나 혐오를 하지 않거니와 에둘러 변명하지도 않지만 나서서 변호하지도 않는, 어찌보면 비겁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무심하고 조심스러운 태도가 차라리 믿음직스럽다. 한국문학이 뻔하다는 담론에서 곧잘 등장하는 타자에 대한 경멸과 약자에 대한 혐오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불륜이나 불손함 혹은 폭력이나 욕설 없이도 충분히 귀기울만한 이야기를 해간다.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다보면 어쩌면 실패 후의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생각만큼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실패 이후의 어른이 된 나 자신도 지금처럼 성실히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묘한 희망마저 갖게 하는 것이다. 참으로 작고 보잘것 없는 희망이었지만 이상하게 기운이 나고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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