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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방에서 ㅣ 암실문고
브라이언 딜런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9월
평점 :
한참 전에 방송에서 한 배우가 오래된 물건들은 사진을 찍어서 보관하고 실물은 정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에는 참 현명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브라이언딜런 에세이 #어두운방에서 를 읽으며 물성이 있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과거를 담은 물건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하나하나 기억을 떠올리며 아카이빙 하고 있었습니다. 그 물건들과 공기, 무드는 섬세하게 묘사하는 글 속에서 읽는 이를 빨아들이고 있었는데요. 군더더기 없는 필력에 하나하나 인상적으로 남았습니다.
_...이 수첩의 역사가 최소한 1920년대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확실하다고 전해왔다. .... 만질 때의 촉감은 20세기 중반에 주로 사용하던 베이클라이트 소재나, 초창기 레코드판 특유의 느낌을 어렴풋이 안겨 준다. 깨지기 쉽고 묵직한 그 물질들의 질감, 연황색 속지들은 몇 주만 사용해도 테두리의 짙은 파란색이 보기 좋게 바래고, 제본된 등 부분이 금세 갈라지려는 경향은 여전하지만, 40년 전과 다름없이 튼튼한 바느질 제본 덕분에 속지들은 제자리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_p182
이런 사물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읽다보면 힐링되는 기분이 드는 게 저도 비슷한 류의 인간인가 싶었습니다. 역시나 결이 비슷할 것 같은 ‘사물들’의 저자 조르주 페렉의 글을 인용한 페이지도 반가웠고- 우리는 책이 눈에 보이는 곳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내용이어서 더 반가웠어요-, 좋아하는 레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 속 문장으로 ‘장소들’ 챕터를 시작한 면에서는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사물과 기억, 오감에 대한 사유는 그곳에 함께 있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로도 이어집니다. 이들의 오래된 사진들로 익숙했던 존재의 낯섦, 그리고 약간의 친숙함을 발견하며 스스로와의 연결점을 찾아가는 지점들도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어렸을 때 사진들을 보며 느끼는 것들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현실은 날카로운 비평가로 사는 저자는, 이 책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회고하며, 자기 삶이 예술과 비평에 절박하게 연결돼 있음를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자신의 기반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브라이언 딜런의 사적인 스토리를 만났지만, 누구나 대입될 수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시절에 따라 두고두고 다르게 읽힐 것 같아요.
_... 사물로서의 책, 책이라는 물성 자체에 주목하게 되자, 비로소 이 책에 깃든 역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이런 생각까지 든다. 어쩌면 어머니가 이 성경책에서 얻은 위로는 사실상 어머니가 필사한 그 구절들이 아니라, 오히려 글을 쓰는 행위 자체와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이다._p139
_원본 사진에서는 60년 전 카메라를 응시하던, 누군지 알 수 없는 어린 소년의 얼굴이었지만, 복사본에서 본 그 얼굴은 반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반쯤은 자부심에 찬, 내가 익히 아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_p243
_어머니에게는 특유의 아우라가 있었고, 그 안에는 분명 몇 년 안에 이곳을 벗어나리라는 소박한 야심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그 야심이 없었다면 내 존재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_p247
_내가 후회하는 건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허비해 버린 시간들, 잔뜩 겁에 질린 채,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대충 검사만 해 봐도 금세 사라지고 말 증상들에 온 신경을 쏟아부으며 보냈던 그 수많은 시간들이다. 나는 내 삶 위를 침울하게 부유하며 보냈던 그 하루하루와 몇 주의 시간들을 후회한다._p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