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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평점 :
단편소설을 무척 좋아한다. 그 이유는 다 읽고 난 후에도 그 여운이 훨씬 깊기 때문이다. 현대 작가들 중에는 이런 임팩트를 주는 단편들이 흔치 않은 편인데, 이번에 #너무늦은시간 을 읽으며 #클레어키건 의 저력을 확실히 확인하게 되었다.
3편의 단편, 너무 늦은 시간,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남극으로 구성된 책 속에는 각각 주인공인 여성캐릭터와 이에 대척점에 있는 남성이 등장한다. 아니 이 캐릭터들은 개인에 국한된 단수가 아니라 복수에 해당될 것 같다.
‘너무 늦은 시간’ 의 카헐은 여자와 함께 하기 위해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는 마음도 돈도 구두쇠 같은 인물이다. 그저 대충 자기집에 들어와 아이를 낳고 그렇게... 여자도 생각할 줄 알고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도통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의 주변 남자들도 다 그렇다... 여주 사빈의 최종결정은? 이들의 대화와 카헐의 마음의 소리에 한숨을 내쉬다가.. 결혼 할까봐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_“난 이런 식일지 몰랐어, 그뿐이야.” 카헐이 말했다. “그냥 당신이 여기 같이 있고, 같이 저녁을 먹고, 아침에 같이 일어난다고만 생각했지. 그냥 너무 현실적이라서 그래.”_p35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문학교수였다는 나이든 남자가 하인리히 뵐의 집에 묵으러 온 여자에게 기껏 이 곳에서 케이크나 만들고 있다고 뭐라고 한다. 처음 본 사람이.... 참 오지랖 넓은 사회가 한국사회인데, 여기 타국의 소설에서 이런 인물을 발견하니 참 착찹해졌다. 그리고 나도 주인공과 같이 마무리를. _그녀는 주전자를 가스불에 얹고 냉장고 깊숙이에서 케이크를 꺼냈고, 기지개를 켜면서 이제 그의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_p81
_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다음 주말에 그 답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_p84 ‘이게 무슨!!’ 이란 탄성이 절로 나오는 이 첫 문장의 ‘남극’, 참 할 일 없는 사람이다 싶으면서도 그래 이런 경우도 있을 거다 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런이런... 장르가 스릴러로... 스스로 함정에 빠져버린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낯선 사람은 무조건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거다. 약간은 멍하게 마지막 문장을 읽은 작품이다.
세 편 모두, 공통으로 떠오는 단어는 ‘폭력’ 이였다. 물리적인 것만 폭력이 아니다. 사회적인 편견과 관습, 말로 하는 무례함, 행동... 소설 속의 캐릭터 당사자들만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나름 당연하게 생각되는 바를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마지막 편은 좀 예외지만.. 저자가 진정 전하고자 하는 바를 완전히는 모르겠지만, 이 안에서 느낀 비슷한 결의 -오지랖과 관습으로 포장된- 폭력에 관한 느낌은 나도 살아오며 경험한 바가 있어서, 이렇게 우회적으로 잘 담아낸 작가가 놀라웠다.
긴 말이 필요없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인다는 것을 잘 보여준 책이였다. 금년의 추천작 리스트에 올렸다.
_우리가 아는 것, 항상 알았던 것,
피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은
옷장만큼이나 명백하다.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_ 필립 라킨 <새벽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