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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함을 듣는 일 - Listen to Silence
김혜영 지음 / 오후의소묘 / 2023년 3월
평점 :
에필로그 소개의 이 문장, “오래 마주 앉은 그림들은 전시장의 벽에 걸리기 전부터 나와 정이 들어 전시를 할 때쯤엔 오래된 친구를 소개하는 기분이 되고는 했는데, 글들은 어떨까?”가 참 마음에 와 닿았던 이 책.
저자는 회화 작가로, 천에 동양화 물감으로 완성된 독특한 질감의 작품들과 때로는 그림의 시작이, 어떤 것은 작품을 그리며 오고간 기억들과 생각들이 단정하게 들어가 있었다.
참 잔잔하면서도 깊이가 있어서, 한동안 나의 새벽을 책임져 주었다. 가만히 글을 읽고 그림을 보다보면 저절로 잠잠해져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생각이나 감성이 공감되어 훅 와 닿을 때도 있었고, 저자가 그림을 시작하게 되는 단초, 해석, 표현하는 과정이 참 흥미롭게도 다가왔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만든 것, 표현한 것들을 가만히 두고 바라보기를 해보기도 하였다. 내 것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하나 더 배웠다.
_새로운 그림에 담길 장면을 만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순간과 조우할 때, 세상은 조용해진다. 그 순간과 나만이 남았다. 조용함을 듣는 시간이다. 여린 안료가 겹겹이 쌓이고, 물맛이 느껴지는 찰나들을 가만히 듣는다._[도입부에서]
각자의 표현법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인데, 이렇게 글과 그림으로 담겨진 정성어린 그림에세이, 한 권 접해보는 것도 무척 좋을 것 같다. 적극 추천하고픈 도서다.
_상상 속에서 여러 시공간을 헤맨 후 마지막에는 꼭 아무것도 없는 빈터를 떠올렸다. 이내 그곳에 집이 지어지기도 했다. 외딴 바닷가에 홀로 선 집. 타닥타닥 연기를 내는 마음이 물결 소리에 묻히는 곳. 그곳을 화판에 옮겨 그렸다. 강한 색감이나 시원한 붓질도 좋지만 눈에 편안히 닿는 색과 느린 붓질이 주는 잔잔한 여운이 더 마음에 들어왔다._p82
_늘 그렇듯 흰 벽에 둘러싸여 있기에도, 어제 사랑한 그림을 오늘 미워하기에도 힘든 날. 몸 안의 바람이 팔 자를 그리며 마음을 휘저었다.
의자에 진득이 달라붙은 몸을 떼어 바다에 갔다.
견디는 하루가 있는가 하면 변덕스러워 나조차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 힘든 하루가 있다.
바닷가 마을의 그림자가 이불처럼 천천히 어깨를 감싼다._p36
_시간이 흐른 후 기억은 자의적으로 변질되곤 한다. 뚜렷한 장면보다는 희미하게 나타나는 그때의 느낌만을 남긴다. 시작과 끝이 모호한 순간의 빛은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주는 매개체가 된다._p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