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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한 이유 ㅣ 워프 시리즈 1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8월
평점 :
_2004년 9월, 12살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나는 거의 지속적으로 행복한 상태에 돌입했다. 원인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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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의 증세 대부분은 두골 내의 압력이 높아진 것이 원인이지만, 뇌척수액을 검사해 본 결과 루엔케팔린이라는 물질의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_p75, 77
오랫동안 신체와 정신은 별개의 것이라는 관념이 지배적이였다. 하지만 신체 메카니즘, 호르몬, 화학작용에 대한 연구가 거듭되면서 건강상태, 호르몬 균형여부 등에 따라 기분이 좌지우지 되고, 생각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 분위기는 더 이상 이 둘을 분리해서 취급하지는 않는 듯하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본격적으로 유물론적으로 바라본 인간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소설집을 만났는데, 그렉 이건의 SF 소설집, <내가 행복한 이유> 이다.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소설, <적절한 사랑>부터 깜짝 놀랐는데, 사랑하는 이의 뇌를 내 몸에서 성장시킨다.... 는 기술이 등장한다. 뇌를 절대시 하는 점은 모순이 있었지만, 이런 발상 자체가 너무 놀라웠다. 그렇게 성장시켜서 낳은 뇌를 가진 이는 과연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맞을까? 너무 무섭고 의문이 들 것 같은 이런 상황이 사랑만으로 가능할 수도 있겠다...?!
이어지는 10편은 평행세계, 인위적인 감정 컨트롤, 바이러스와 종교, 두뇌개조, 컴퓨터와 일체가 된 인간의 뇌, 등 사실 어디에선가 한번쯤은 읽었거나 영화나 드라마로 보았던 내용들이였으나, 훨씬 세련되게 풀어놓았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 정의에 대한 나름의 해석들을 던지고 있었다. 최고의 생명체라는 인류의 오만함에 그냥 우리는 이런저런 화학작용과 신경전달과정을 통해 정신을 형상화하는 동물일 뿐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내 눈을 끄는 되풀이되는 한 가지는, 각 편마다 맨 마지막에 슬그머니 등장인물의 속내 혹은 결심을 넣어놓았다는 것이다. 팽팽하게 긴장하며 읽다가 이 부분에서 숨이 탁 놓였다.
세계적인 SF상이 인정하는 작품성으로 이미 최상급 작가 중 한 명이라고 평가받는 그렉 이건, 그리고 한국판 특별 선집이라는 이 소설집. SF소설 팬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또한 인간 의식에 대한 해석을 같이 따라가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_그이는 내 안에 있어. 이젠 누구도 그이를 다치게 할 수는 없어. 적어도 거기까진 성공한 거야._p27
_S는 사용자에게 자기 분신이 살고 있는 어떤 평행세계에서도 해당 분신의 삶을 대리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쌍방이 대뇌생리학적으로 충분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면, S사용자는 분신에 대해 기생적인 공명 링크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_p149
_28년 동안이나 함께 살아왔으니 지금도 충분히 속여넘길 수 있을 정도로는 그를 닮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오감을 통해 전달되는 자극을 빠짐없이 관찰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그와 같은 입장에 설 수 있을 것이고, 내가 그와는 다른 존재라는 자각을 일시적으로 망각하고 동기화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_p262
_신기함과 일상, 실용주의와 관념주의, 가시와 불가시 사이에 존재하는 이 새로운 모순을 받아들이려고 고투하는 우리의 세계에 어떤 변화가 올지를 상상하며._p389